1629년 한성부 정선 방에서 태어났다. 할아버지는 윤황이고, 아버지는 윤선거이며, 어머니는 공주이씨로 이장백의 딸이다. 할머니는 창녕 성씨로 서인이자 성리학의 대학자 우계 성혼( 1535년 6월 25일 ~ 1598년 6월 6일 )은 조선 좌찬성 직책을 지낸 조선 중기의 문신, 작가, 시인이며 성리학 자, 철학자, 정치인이다. 자는 호원 호는 우계 또는 묵암 시호는 문간 본관은 창녕 성수침 의 아들이자 문하에서 수학하다 휴암 백인걸 문하에서 배웠다. 이때 이이를 만나 평생 친구로 지냈다. 학행으로 천거되어 거듭 사퇴하였으나 이이 의 권고로 출사했고, 이이 사후에 출사하여 의정부 좌찬성에 이르렀다. 문묘에 종사 된 해동 18현 중의 한 사람이다)의 딸로, 그는 성혼의 진 외증손이었다. 그가 태어날 무렵 그의 본가는 충청남도 노성에 있었으므로, 노성 출신으로도 본다. 그의 집안은 일명 노성 윤 씨 라고도 부른다. 윤증의 고조인 윤돈이 처가가 있는 충청남도 노성에 처음 정착해 '노성 윤씨'라는 별명을 얻었다. 파평윤씨가 노성 지방에 입향하는 것은 윤탁의 손자인 윤 돈에서 비롯된다. 윤 돈(1519~1577)은 그 선대가 장단에 세거하였는데, 그는 부모와 같이 서울에 거주하다가 처향인 노성 근방의 이산현 윤면으로 입향하였다. 윤돈의 처는 문화 류씨로 이곳에 세거한 재 지사족) 당 후 촌이다. 파평 윤씨가 노성에 입향하여 재 지사족으로 위상이 높아지는 것은 윤돈의 손대에서 비롯된다. 조선시대 사족이 타향에 입향하여 재지사족의 일원이 되는 것은 조선 사회의 향촌 사회 특성과 관련된다. 조선의 향촌 사회는 지연, 혈연, 학연의 연관을 통해서 재 지사족으로서 위상을 갖출 수 있다. 그 지역의 학맥에 동승하여 가문에서 현출한 인물이 배출되면 재 지사족으로, 또는 좀 더 넓은 지역의 명족으로 이름나게 된다. 노성의 파평윤씨는 입향조인 윤돈의 손자 윤 황 대에 기호학파( 대부분 기호 지방 (경기 충청 일원)에 거주했으므로 기호학파라고 부르게 되었다)에 일각을 이루면서 증손인 윤선거의 형제와 종형제에 이르러 기호 학맥을 잇는 호서학파의 큰 맥을 형성하고, 혼 변도 거의 같은 시기에 무안 박씨를 비롯한 광산 김씨 은진 송씨 등 호서의 명족과 인연을 맺으면서 노성의 파평윤씨는 학연과 혼 변에서 우뚝 솟는 명망 있는 사족으로 성장한다. 노성의 파평윤씨가 기호학파에 연원하는 것은 윤황과 동생 윤전이 성혼의 문하에서 수학한 데서 비롯된다. 성혼은 율곡 이이와 함께 기호학파의 종장이다. 성혼은 조선 도학의 도통인 조광조에 학문의 연원을 두고 있다. 조광조의 문인인 11) 우참찬으로 임명되었으나 사퇴했고 이듬해 동서분당의 폐단을 지적하고 군비확장을 주장했다. 선조 때 청백리의 한사람으로 녹선 되었으며 학문에 정진하여 후일 대학자 율곡 이이 와 우계 성혼을 문하에 배출하였다)과 성수침의 가르침을 받았는데, 성수침은 그의 아버지이다. 성혼은 가학을 전수받아 이를 계승하였다. 윤황과 그 동생 윤전은 성혼 백인걸(1497년 ~1579년 9월 29일)은 조선시대 중기의 문신이자 사림파 정치인이다. 1578년(선조 의 문하에서 수학하였고 윤황은 성혼의 사위가 되었다. 이 같은 혈연과 학연은 성혼의 가학이 노종의 가학으로 전승되는 계기가 된 것이다. 그리고 조선의 성리학이 이황 이이 이후 영남 기호학파에 속하게 된다. 기호학파는 성혼 이이를 종장으로 기호지방에 확산한다. 그러나 기호학파의 중심이 근기에서 호서 연산 회덕 노성으로 옮겨진다. 특히 이 지역으로 옮겨지는 기호학파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학문적으로도 특성을 보이게 된다. 예학이 중심 과제가 되고 주자 성리학이 강조된다. 그리고 학파(학문을 연구하는 사람 또는 학문에 능통한 사람을 학자 ( 영어 : scholar )라고 부른다. 학문에서 주장 또는 사상 철학 등을 달리 하는 갈래 또는 그러한 사람들의 모임을 학파 (영어 : school )라고 한다 =정파(는 정당, 이념, 계파 등의 정치적 용어를 가리킨다.)라는 등식이 성립되고 있던 당대에 이들은 서인으로 활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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