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파평. 자는 자인 호는 명재 유봉 시호는 문성이다. 당색은 서인, 소론의 영수이다. 윤선거(1610년∼1669년 4월 21일)는 조선 후기의 유학자, 시인, 정치인이다. 자는 길보 호는 미촌 노서 산 천재이다. 본관은 파평 이다. 신독재 김집의 제자이며, 인조 때 생원시에 급제해 성균관에 들어갔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났을 때, 강화도로 피란하여 성문을 지키다 점령당하였다. 이때 그의 아내는 자살하고 그는 평민의 옷을 입고 성에서 탈출해 살았다. 그러나 비겁하게 살아남은 것을 후회하여 금산으로 내려가 김 집의 문하에서 수학했고 스승 사후에도 출사하지 않고 평생을 학문 연구에 바쳐 성리학의 대가로서 이름을 떨쳤다. 그 뒤 여러 차례 관직에 임명되었으나, 살아남은 것을 자책해 모든 관직을 사퇴하고 학문에 정진하였다. 절친한 송시열 윤휴

가 학문적 문제로 대립하자, 중립을 취하여 오히려 오해한다. 그 뒤 예송 논쟁[예절에 관한 논란으로, 효종 계모이자 효종 비 인선왕후에 대한 시가 계모 자의대비 의 복상 기간을 둘러싸고 현종 숙종 시대에 발생한 서인과 남인 간의 관련된 두 번씩의 상대적인 논쟁이었다.] 직후에도 양자의 의견을 조정하려다가 송시열에게 윤휴와 결별할 것을강요당하기

도 한다. 송시열은 그의 오랜 친구이자 사돈이었으나, 병자호란 당시 혼자 피신한 것과, 예송 논쟁 당시 그가 윤휴의 의견을 두둔하면서 관계가 악화하였다. 사후 증 이조 참의에 증직이 되었다가 다시 아들 윤증의 현 달로 증 의정부 영의정에 추증(이란 관료의 사후에 품계 또는 직급을 높이는 일, 또는 관직 없이 죽은 사람에게 사후 관직을 내리는 일을 말한다)되었으나 1715년 유계와 함께 펴낸 가례

원류의 발문을 놓고, 노 소론이 싸움을 벌여 아들 윤증과 함께 관작이 추탈 당했다가 1722년(경종 2)관직에 돌아왔다. 금산군 남일면 음대리에 산천 재서 원이 건립되어 배향되었다. 이후 산천 재서 원은 영조의 서원 훼철령에 따라 1741년(영조 17년)에 훼철되었다. 저서로 노서유고 노서일기 등이 있다. 충청남도 출신으로 김장생, 김 집의 문인이다. 시호는 문경이다) 의 아들이다. 서인 윤선거, 김 집, 유계, 권 시, 송시열의 문하생이다. 서인이 노론, 소론으로 분당할 때 소론의 영수가 된다. 유계 김 집의 문하에서 수학하다가 권시의 문하에서도 수학했으며, 김 집의 추천으로 우암 송시열의 문인이 되었다. 그러나 아버지 윤선거의 묘비 문 문제로 발생한 회니, 논쟁과 김익훈, 김석주의 역모 날조에 염증을 느껴 후일 노론이 된 주류파와 갈등하였으며, 아버지 윤선거의 비문 문제를 계기로 송시열과 절교한 후 소론의 영수가 되었다. 효종 때 내시 교관으로 임명되었으나 곧 사직하고 현종이 여러 차례 관직을 제수했으나 사양하다가 1682년 관계에 나가 판돈령부사에 이르렀으나 사퇴했다. 1715년에는 아버지와 스승 유계의 공동 저서 가례원류 발문 속에서 정호로부터 비난을 받아 당쟁이 격화되어 소론이 거세당하고, 우의정에제수되었으나 사직하고 판중추부사(종1품 관직을 지낸 재상들 우찬성 과 좌찬성 우의정 과 좌의정 영의정을 지낸 사람들이 주로 임명되었다)로 전임

되었다가 사망한다. 사후 좌의정에 증직되었으나 가례원류 문제로 후에 그의 관직도 축출되었다가 1722년에 복구되었다. 학문 연구로 일생을 보냈으며, 그는 성리학 외에도 양명학과( 중국 명나라의 철학자 중 국왕수인(1472~1528)의 호인 양명에서 이름을 따서 붙인 유가 철학의 한 학파로 주관적 실천 철학에 속한다. 양명학이라는 명칭은 메이지 유신 이후에 퍼진 것으로, 그 이전에는 육왕학 또는 왕 학이라 불렸 다.) 실학사상을 접하고 연구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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