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미애(수필가·문학평론가)의 생각정원

글루미 선데이(Gloomy Sunday).

전 세계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자살의 송가다. 이 노래를 작곡하고, 부다페스트의 한 빌딩에서 투신자살한 작곡가 레조 세레스는 이런 말을 했다.

“나는 내 마음속 모든 절망을 이 곡의 선율에 눈물처럼 쏟아냈다. 나와 비슷한 처지에 있는 사람은 잊었던 상처를 스스로 발견할 것이다.”

레조 세레스의 눈물과 그 눈물에 깃든 상처가 오선지마다 배어나서일까. 레코드가 출시된 지 8주 만에 헝가리에서만 187명이 자살할 것을 시발로, 이 노래에 얽힌 극적인 죽음의 일화는 60여 년 동안이나 전 세계를 떠돌았다. 대체 이 노래에 담긴 그 무엇이 사람들을 죽음으로 이끌고 있는 걸까. 그리고 왜 수많은 사람들이 이 노래에 깃든 죽음을 예찬하고 있으며, 우린 왜 여전히 그 죽음의 치명적인 유혹에 매혹돼 있는 것일까.

요즘 들어 인생살이의 의식에 제법 초대받을 때가 많아졌다. 백일과 돌잔치, 결혼식과 환갑 그리고 장례식… 그런데 다른 의식은 몰라도 장례식만큼은 빠지지 않고 참석하는 편이다. 삼십도 되기 전에 떠나보낸 시어머님, 친정어머니의 잔영이 남아 있기도 해서지만 죽음이야말로 자신을 가장 겸허하게 돌아보게 만드는 사건이기 때문이다.

좀 역설적으로 들리겠지만 남의 죽음은 내 삶, 죽음의 정체에 대한 또 다른 확인이기도 하다. 또한 죽음을 통해 삶을 어떻게 볼 것인가라는 다소 형이상학적인 물음으로부터 시작해서 죽음은 어찌 보면 해답 없는 질문이 아닌가 한다.

푸르던 스무 살 무렵, 자살을 꿈꾼 적이 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아주 사소한 일이었는데도 그때의 나는 참으로 다혈질의 성격을 지니고 있었는지, 뒤도 돌아보지 않고 한강으로 달려갔다. 모순투성이의 세상 속에서 나의 진실을 알릴 수 있는 방법은 하나뿐인 생명을 던지는 일이었다. 그래서 그들이 나를 기억할 때마다 후회와 죄의식 속에 살아가게 하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저항이라 여겼다.

물가에 내려섰다. 가지런히 구두를 벗어놓고 짧은 편지도 한 장 써서 핸드백에 넣었다. 혹여 내 죽음이 의미가 없어지면 어쩌나 하는 기우에 나름대로 해명의 글을 써 놓은 것이다. 발끝에 닿는 강물이 사람들의 이기적인 마음처럼 차가웠다. 나 하나쯤 세상에서 사라진다 해도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시간은 흐를 테지. 더군다나 사회에서 낙오한 사람을 어느 누가 기억할까. 아마도 나의 존재는 금세 잊혀 지리라. 선뜻 거리는 강물의 차가움이 종아리까지 밀려들었다.

그 순간 심하게 통증이 밀려왔다. 태동이었다. 내 몸에 새로운 생명이 숨 쉬고 있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아기는 계속해서 내게 신호를 보냈다. 나는 그만 주저앉아 펑펑 울고 말았다. 순간의 충동으로 아기를 잃을 뻔한 것이다. 문득 집에 가고 싶었다. 우습게도 따뜻한 아랫목과 밥 냄새 풍겨오는 집이 그리워진 것이다. 결국 나는 패자처럼 집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우리 모두는 치열한 삶의 경쟁 속에서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다. 조직 사회라는 거대한 톱니바퀴의 한 부분으로서 날마다 시달리면서도 어떻게든 발버둥 치며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곳에서 이탈할 수도 없다. 이탈은 곧 생존 경쟁에서의 탈락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또 자신과 가족들을 위해서라도 이탈해서는 안 된다. 아무리 힘들고 고통스럽더라도 참고 견뎌야 한다. 그러나 나는 그 치열한 톱니바퀴에서 이탈하려고 했다. 세상과 싸워 이겨내려는 삶을 포기하고 죽음을 선택한 것이다. 그렇지만 결국 실행에 옮기지는 못했다. 간혹 어떤 사람들은 말한다. 죽음을 선택하는 사람들은 용기 없는 패배자일 뿐이라고. 하지만 내 경험상 죽음을 선택하는 행위는 분명 대단한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다.

인간은 모순과 부조리에 대해 반항할 수밖에 없는 이성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그것이 제대로 해결되지 못할 때 혹은 그로 인해 갈등이 멈추지 않을 때 죽음을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집요하면서도 자학적인 성향도 함께 갖고 있다. 그래서 반항하고 싶은 인간으로서의 충동심, 현실의 모순과 부조리에 대한 도전, 불가항력적인 상황에 대한 절망과 갈등으로 이제까지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또 지금도 죽어가고 있는 것이다.

꽃의 향기가 물결처럼 일렁인다. 어쩌면 우리는 낙화가 일러주는 죽음의 향기에 취해 한동안 생과 사를 넘나드는 환상의 늪에 빠져 헤어나올 수 없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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