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다 읽고 나니 친구가 선물해서 알게 된 독일의 헤비메탈그룹 할로윈이 생각났다. 법대에 진학한 형과 비교당하다 아예 공부를 포기한 그는 부모의 강요에 의해 미국으로 떠났다. 말이 유학이지 집안 망신이라고 내몰렸다는 걸 아는 듯 맘껏 방황하는 눈치였다. 
 가끔 주고 받는 편지에 나는 어떻게든 틀에서 벗어나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는 내용을, 그는 반대로 틀로 들어오기 위해 애쓰는 내용을 썼다. 그가 잠깐 들어왔을 때 우리는 오락실을 찾았다.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다는 내 말을 기억하고 있었던 거다. 룰을 알아야 재미있는 법. 아무리 총알을 날리고 핸들을 꺾어도 즐겁지 않았다. 
 그는 뭘 즐기고 풀어지는 데 서툰 내게 극약처방이라며 할로윈 그룹의 음악을 안겼다. 격렬한 반동이 온몸과 마음을 흔들었다. 그들은 내가 한 번도 지르지 못한 소리를 내고 있었다. 퇴폐나 방종이 아닌 순수한 열정이 그들에게도 있었다. 나는 낯선 곳으로 발걸음을 뗄 용기가 없는 겁쟁이에 불과했던 거다.
《술라》(토니 모리슨 글, 김애주 옮김, 들녘)는 폭풍우가 쏟아지는 밀림이다. 술라를 비롯한 인물들은 그 어둠 속에서 갑자기 튀어나오는 야생동물 같다. 에바는 자식을 키우기 위해 기꺼이 한 쪽 다리를 기차 선로에 얹는다. 하지만 아들이 전쟁에서 받은 상처로 정상적인 생활을 하지 못하자 그가 잠든 침대에 불을 지른다.
 그녀의 딸 한나는 남편이 죽자 매일매일 본능에 충실한 삶을 산다. 신혼부부가 첫날밤을 치르기도 전에 새신랑과 사랑을 나눌 만큼 쾌락을 추구하던 그녀는 옷에 불이 붙어 죽는다. 술라는 그런 엄마의 죽음을 보곤 즐거워하는 듯한 표정을 지어 주위 사람을 경악하게 만든다. 심지어 친한 친구의 남편과 잠자리를 갖고도 죄책감을 느끼지 못한다. 그녀에겐 세상의 중심이 오직 그녀였기 때문이다. 
 

이들의 삶에 흑인 문학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공동체는 없다. 도덕적인 잣대를 들이대는 것도 의미없다. 글쓴이는 세 여인을 통해 그들의 반도덕성이 오히려 비상의 신화를 일굴 원동력으로 전환될 수 있기를 바랐다. 덕분에 이들은 억압과 틀에서 벗어나 “난 내 마음을 갖고 있어. 그리고 그 마음속에서 진행되고 있는 것을 갖고 있지. 말하자면, 난 나를 갖고 있어.”라고 말한다.

 인물들은 종잡을 수 없이 겅중대지만 글은 고요히 흐르는 강물을 보는 듯 하다. 비난받을 만한 이들의 말과 행동은 글쓴이의 아름다운 문장 덕분에 힘을 얻는다. 마치 뚝 떼어 옮기면 산문시로 읽힐 만큼 깊고 우아하다. 아마 글쓴이는 아마존 같은 미지의 영역을 품고 있는 사람일 거다. 나는 그 안에서 춤추고 있는 그들과 함께 어울렸다.

 정사각형. 나는 틀 안에 있는 게 편안한, 그런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가 안긴 헤비메탈 음악이 나를 바꾸기 시작했다. 서서히 생긴 균열이 이 책을 통해 깨지는 걸 느낀다. 자기 아닌 딴사람을 만들지 않고 자신을 위해 떠돌아 다니는 것. 온전히 자기 삶을 끌어안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

 술라를 규정짓기는 어렵다. 에바의 오만과 한나의 자기 탐닉, 그 어떤 의무감도 갖지 않으려는 그녀의 삶은 하나의 실험이다. 그럼 나 자신을 규정짓는 건 가능한가. 부도덕한 사람은 되고 싶지 않지만 단정지을 수 있는 사람도 싫다. 글쓴이처럼 마음 속에 드넓은 공간을 갖고 싶다. 클래식과 록이 공존하는 그런 곳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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