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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이 시인이 아닐 때
반월신문 | 승인 2020.08.12 16:58

《일곱 해의 마지막》(김연수 글, 문학동네)은 백석 시인이 ‘시인’이기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담은 가슴 먹먹한 기록이다. 그는 북에서 러시아 문학을 번역하는 일에 집중하다 1956년에 이르러서야 다시 시를 쓰겠다고 마음먹는다. 하지만 1962년에 동시 〈나루터〉를 발표하곤 시를 쓰지 않았다. 
 〈나루터〉는 그가 압록강 변에서 나무를 심고 길을 닦는 어린이들을 바라보며 그 아이들과 비슷한 나이에 그 강을 건너가던 ‘나이 어리신 원수’님을 찬양하는 시다. 강요에 의해 찬양시를 써야 했던 그의 심정과 삼십 여 년에 걸친 기나긴 침묵을 생각하니 울음이 목울대까지 차오른다.
 백석이 누구인가. 고향인 평안북도의 토속적인 우리말로 민중들의 삶을 노래한 시인이다. 그의 시는 우리네 삶의 체취와 호흡이 물씬 풍겨서 다른 시인들이 그의 시집 을 필사본으로 만들어 애독하거나 선물할 정도였다. 나는 〈여우난골족〉이란 시로 그를 만났는데 천연두를 앓아 얽은 얼굴을 ‘별자국이 솜솜 났다’고 표현한 걸 보고 별의 또 다른 아름다움에 눈떴다.
 그런 그에게 시대는 어렵게 쓰지 말고, 개성을 발휘하지 말고, 문체에 공을 들이지 말라고 충고했다. 당과 수령이 원한 건 새로운 시대에 어울리는 인간형을 만드는 일이었으므로 백석의 순수한 언어는 허락될 수 없었다. 매일매일 시를 못 쓰는 거냐, 안 쓰는 거냐고 다그쳤다.
 하지만 그는 자기를 속일 수 없었다. 어린 시절의 놀라웠던 산천과 여우들과 붕어곰과 가즈랑집 할머니를 잊을 수 없었다. 통영의 그 여인과 바다, 김 냄새 나는 비를 버릴 수 없었다. 그에게 시는 흥성하고 눈부셨던 시절에 그가 사랑했던 모든 것들의 결과물이므로 사랑을 증명할 수만 있다면 불행해지는 것쯤이야 두렵지 않았던 거다.
 이제 여리고 작고 잊히게 될 이름들을 소중히 여기던 그는 사라졌다. 자신이 나고 자란 시골 학교에서 아이들에게 영어를 가르치고 싶다는 그는 없다. 착한 아내와 함께 두메에서 농사지으며 책과 벗해서 살고 싶다던 소박한 그는 자취를 감췄다.
 시로 꽉 찬 사람이 시를 꺼낼 수 없을 때 그의 삶은 무엇이었을까. 나는 젊은 시절의 백석, 모던보이였던 그와 1990년대 인민증의 사진으로 남은 그를 한참 번갈아봤다. 시인 아닌 시인이 된 그가 죽어가는 그 많은 말들을 어떤 마음으로 지켜봤을지 생각해 봤다. 세상의 언어를 다 버리고 허깨비로 남은 텅 빈 눈빛을 봤다.
 그를 허망하게 놓아줄 수는 없었다. 글쓴이도 같은 고민을 한 듯 인근 초등학교 학생들이 쓴 동시를 읽게 한다. 그건 백석이 살아보지 못한 세계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고 죽는 순간까지 그가 마음속에서 놓지 않았을 소망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글쓴이의 그 마음이 고마워서 또 울컥했다. 
 시대를 잘못 만나 불행한 삶을 산 사람들을 다시 떠올린다. 전쟁과 권력에 의한 횡포는 이제 멈출 때가 됐다. 더 이상 잃을 이름이 없어야 한다. 누구나 자기가 좋아하는 걸 하면서 살아야 한다. 몇 편의 시로 만나 좋아하게 된 그를 아주 많이 사랑할 게 될 것 같다. 
 그는 검지를 들어 위에서 아래로 그으며 비는 그렇게 길게 떨어지는 소리라고 말했다. 그가 바라보고 말한 장맛비가 온종일 내려 나는 아프고 그립고 서글프다. 젖은 언어가 그와 나 사이에 흐른다. 

수필가 한우리독서토론논술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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