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영주 수필가

현대사에 대해 아는 게 없고 물어볼 사람이 없을 때 이철수 판화가는 그림으로 대학생과 시민이 거리로 뛰쳐나올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설명해줬다. 그의 작품은 얼마나 힘이 넘치고 목소리가 높던지. 삶이 고단한 사람들의 모습에 눈시울이 뜨거워져서, 마치 나를 보는 것 같아서 한참을 바라보곤 했다. 그냥 그림인데 무언가 울컥 치밀어서 견디기 힘들었다. 그의 판화는 세상을 보여주는 거울이고 올바른 길을 가리키는 신호등이었던 셈이다.

그런데 갑자기 그의 그림에서 현실이 사라졌다. 그 이유를 목판화 30년 선집인 《나무에 새긴 마음》(컬처북스)을 읽고 알았다. “1980년대 민중판화 작업은 당시의 사회적 요구와 민족미술에 대한 열망이 맞물려 나름대로의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거기에서 무슨 의미를 찾을 수 있었는가. 의도했던 목적을 얼마나 성취했는가.” 그는 자본주의의 위력을 확인하고 독일의 통일과 동구권의 몰락을 지켜보면서 정신세계, 동양적 사상에서 대안을 찾았던 거다. 나는 조계사에 드나들고 종로를 거닐면서 그의 선화(禪畵)에 빠졌다. 나무 몇 그루 서 있고 집 한 채 덩그러니 앉은 모습에 마음이 편안해지니. ‘꽃잎이야 저 혼자도 떨어져 나리는 것. 바람 일으키지 말고 고요히 바라보라. 그대 바라보는 서슬에도 꽃잎 흩어지거니...’ 목판화의 온기에 내 찌든 삶이 방금 세수하고 난 것처럼 맑아지는 듯했다. 바람이 내 몸과 마음에 드나드는 듯 시원함을 느꼈다. 단순하고 질박한 그의 그림은 한 편의 시였다.

그의 판화는 또 한 번 옷을 갈아입는다. 충북 제천의 평동마을에 터를 잡아 직접 농사를 짓는 일상과 자연을 담은 거다. 여백이 줄고 글은 풍부해져 땅과 하늘, 정직한 얼굴들의 이야기가 마음껏 펼쳐졌다. 그는 잡초라 부르는 것조차 모두 아름답고 세상에 시시한 인생은 없다고 읊조린다. 성이 난 채 길을 가다가 작은 풀잎들이 추위 속에서 기꺼이 바람 맞고 흔들리는 것을 보곤 마음을 풀었다고 고백한다. 산하대지뿐 아니라 일상사 하나하나를 경전으로 여기며 살고 싶었다는 말을 오롯이 담았다.

나도 일감이 잔뜩 쌓인 밭에서 혼자 멍하니 선 사람에게 “당신도 힘들지요?”라고 말을 건넨다. 긴 콩밭 언덕을 오르는 어르신과 꼬불꼬불 길을 함께 오른다. 둘이 나눌 이야기가 문득 궁금해지고 문득 기다려진다. 그에겐 자기 판화가 일상의 고백이자 반성문인 것처럼 나는 글이 내 삶의 고백이자 반성문이다. 그래서 허투루 쓸 수가 없고 여전히 갈지자걸음인 것이 부끄럽다. 이렇게 그는 늘 나보다 몇 발자국 앞서 갔다. 세상일에 참견하고 화두로 삼고 사느라 힘들었을 거다. 어쩌면 그 덕에 나는 길 잃을 일이 없어 자주 웃는지도 모르겠다. 내 앞에 누군가 묵묵히 걷는 사람이 있다는 건 고마운 일. 몇 권의 산문집과 이 책을 애틋한 마음으로 쓰다듬는다.

그의 다음은 무엇일까. 몸은 제천에 있지만 온라인 공간에서 꾸준히 사람들과 만나고 있는 걸 보면 공간은 그저 몸을 잠깐 맡기는 장소에 불과한 것 같다. 사는 게 그림 그리는 일만은 아니어서 틈틈이 농사일도 하고 사람도 본다는 그가 부럽다. 나는 어디에 머물며 어떻게 어울려 삶을 닦을 것인가. 오랫동안 그를 알아왔다고 말을 꺼내도 될 만큼 내 삶이 부끄럽지 않으면 좋겠다. 그가 나무에 그를 새기듯 나도 글에 나를 새기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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