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을 갈 것인가 빚을 갚을 것인가 고민할 만큼 고품격 여행비용은 무척 비쌌다. 우리 가족이 10일간의 여행에 지불할 돈이면 빚의 절반을 갚을 수 있었으니까. 그럼에도 나는 열심히 남편의 옆구리를 들쑤셨다.

인생 뭐 있냐, 살아보니 내 뜻대로 안 되는 게 삶이고 다른 길이 생기는 게 삶이더라. 그냥 지금 하고 싶은 일을 다음으로 미루지 말자고 말이다. 현실이 팍팍한데 여행까지 저렴하게 가기는 싫다고 잔뜩 바람을 넣었다.

그렇게 떠난 고품격 여행은 이름값을 했다. 우리는 별 다섯 개가 반짝이는 호텔에서 묵었고, 유명하다는 음식들을 고루 챙겨먹었다. 가이드 눈치를 보면서 쇼핑센터를 끌려 다니지 않아서 좋았고 어디를 가든 가장 좋은 자리를 차지할 수 있어서 좋았다.

내가 특별히 그 일정을 고집한 건 프랑스 파리의 ‘세느강 디너 크루즈’ 때문이었다. 단순히 유람선에 올라 풍경을 보는 게 아니라 오케스트라가 직접 연주하는 음악을 들으며 야경을 즐기는, 현지인도 특별한 날에만 찾는다는 프로그램에 끌렸던 거다.

배는 윗부분 전체가 유리로 만들어져 강 주변의 모습을 막힘없이 볼 수 있었다. 고풍스런 건축물들이 느리게느리게 흘러가는 여름밤에 우리는 영화의 한 장면처럼 와인을 마시고 음악에 맞춰 춤을 췄다.

다시 현실로 돌아와서야 우리가 분수에 맞지 않는 미친 짓을 했다는 걸 알았다. 그 밤의 기억은 꿈처럼 아득하고 빚은 가까이 있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후회하진 않았다. 오랫동안 그 밤의 기억은 나를 살게 했고 견디게 했으니까.

삶의 여러 장면 중에서 하나를 고르라고 한다면 주저 없이 그 때의 우리 가족을 이야기할 만큼 우리는 충분히 행복했고 충분히 사랑했다. 평소의 나였다면 절대로 계획하지 않았을 또 다른 내가 만들어 낸 10일 간의 여행. 그건 기막힌 일탈이었고 근사한 선물이었다.

〈여행의 이유〉(김영하 글, 문학동네)에서 글쓴이는 글 쓰는 일을 하고 여행에 관한 책을 여러 권 냈음에도 영감을 얻거나 글을 쓰기 위해서 여행을 떠나지는 않는다고 했다. 여행은 오히려 익숙한 것과 멀어지기 위해서 떠나는 것이라고.

그는 격렬한 운동으로 다른 어떤 것도 생각할 수 없을 때 마침내 정신에 편안함이 찾아오듯 잡념이 사라지는 곳, 모국어가 들리지 않는 땅에서 평화를 느낀다. 여행하는 동안에는 모든 것이 현재시제로 서술되므로 과거에 대한 후회와 미련, 미래에 대한 불안과 걱정은 먼 풍경으로 물러나기 때문이다.

여행을 끝내고 현실로 돌아와야 그 경험들 중에서 의미 있는 것들을 생각으로 바꿔 저장하게 되고, 그런 길 위의 날들이 쌓여 지금의 우리를 만드는 거라고 말한다. 그래서 그는 오직 현재를 살아가기 위해 떠난다고 했다.

그는 여행을 빗대어 말했지만 삶 자체가 그렇다. 정말 기쁘고 정말 아플 때 다른 생각이 들어갈 틈이 있던가. 내 일기장은 그런 날엔 텅 비어 있다. 좋은 건 만끽하느라, 나쁜 건 견뎌내느라. 생각과 느낌은 몇 발자국 떨어져서야 온전히 내 것으로 녹아들었다.

그래서 나는 여행 앞에선 늘 미치고 싶다. 가능하면 고품격 여행을 꿈꾼다. 열심히 산 나에게 주는 선물이니까. 여기가 아닌 거기에서 가능한 그 무엇을 찾아 낯선 곳, 낯선 경험 속으로 나를 데려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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