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로 심란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 든 책 《모두 다 예쁜 말들》(코맥 매카시 글, 김시현 옮김, 민음사). 서부 장르 소설을 고급 문학으로 승격시킨 한 소년의 성장기다. 주인공인 그래디가 고향인 텍사스에서 국경을 넘어 멕시코로 갔을 때가 열여섯 살이었다. 우리나라 나이로 치면 중학교 3학년. 나는 그 나이에 무엇을 하고 무슨 생각을 했던가.

인문계 고등학교를 가고 싶었다. 그래야 대학을 가기 쉬웠으니까. 그런데 나날이 기울다 못해 쓰러지기 직전인 우리 집 형편으로는 꿈도 꾸지 못할 일이었다. 상업계 고등학교를 다닐 생각에 시들해진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엄마가 말을 꺼냈다. 방학 동안 배낭을 만드는 공장에서 학비를 벌어야 한다고 말이다. 내가 만난 학교 밖 첫 세상은 그렇게 시작됐다.

규모가 제법 큰 회사였다. 하루 종일 미싱 수십 대에서 배낭이 쏟아졌다. 미싱이 돌아가는 소리와 음악 소리, 사람들의 목소리가 섞여 시끌벅적했다. 나는 아줌마들 틈에 끼어 잘못된 제품을 골라내고 라벨 등을 붙이는 마무리 일을 맡았다. 딴 생각을 할 틈이 없어서 좋았고, 모든 게 처음이라 신기하기만 했다.

결함이 있다고 반품된 물건을 헐값에라도 팔기 위해 남대문시장으로 향하는 직원들과 하얗게 질린 공장장의 모습을 보며 세상에 쉬운 일은 없다는 걸 알았다. 보조로 일하고 있는 내 또래의 아이들도 처음 봤고, 동성끼리 좋아하는 모습도 처음 봤다. 공부를 하기 위해 시작한 일이었지만 학교에서 배운 것보다 더 많은 것을 두 달 동안 배운 거다.

친구들은 집에서 놀 시간에 일을 한다고 투덜거렸는데 그래디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었다. 그의 모험은 선조들이 애써 일군 목장을 엄마가 팔아넘기자 멕시코로 향하면서 시작된다. 태어나서 한 번도 떨어진 적이 없던 말들. 그는 사람을 사랑하듯 말을 사랑했다. 어쩌면 사람 보다 더 말을 사랑했는지도 모른다. 그런 말들과 함께 있을 수 있다면 어디든 두렵지 않았고 무엇을 하든 상관없었다. 마치 내가 학교를 다니기 위해 공장으로 향했듯이 말이다.

그가 친구 롤린스와 나선 여행은 블레빈스와 동행하면서 꼬이기 시작한다. 블레빈스는 말을 잃어버린 후 되찾기 위해 애쓰다 사람을 죽이고 자신도 죽게 된다. 같은 혐의로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히게 된 두 사람. 롤린스는 칼에 찔리고, 그래디는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다른 사람을 죽인다. 게다가 쫓기기 전 야생마를 길들이는 목장에서 일하며 그 목장 주인의 딸과 사랑에 빠지지만 결국 이별하고...

비록 같은 시기에 같은 곳에서 경험을 한 건 아니지만 우리는 둘 다 나이도 성격도 다 다른 사람들과 만나면서 웃고 울었다는 공통점이 있다. 좋은 일과 나쁜 일을 겪었고 도움을 받거나 주기도 했다. 그러는 사이에 말랑말랑했던 마음이 불운을 자신에게 주어진 선물이자 힘으로 여겨야 한다는 글쓴이의 의도처럼 단단해졌으리라.

그래디가 말을 지키고 다시 길을 떠난 것처럼 나는 학교로 돌아갔다. 비록 원하던 학교는 아니었지만 공부를 계속 할 수 있다는 게 얼마나 좋았는지. 그곳에서 계속 보조로 일을 하고 있을 또래의 눈빛을 오래 기억하면서 조금은 착한 사람이 됐다. 지금도 나는 이런저런 일들을 겪으며 생각하고 느끼고 자라는 중이다. 어쩌면 배움은 학교를 졸업하면서 끝나는 게 아니라 살면서 계속 되는 진행형인 것 같다. 세상에 공짜가 어디 있던가. 그렇게 생각하니 지금의 상황이 마냥 불안하진 않다. 견디면 되는 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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