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아침 식구들이 자기 일을 찾아 나서야 온전히 내 시간이 된다. 가장 먼저 하는 일은 텔레비전 끄기. 곧 고요가 내려앉는다. 좋아하던 음악도 가끔 거슬릴 때가 있는데 이런저런 소리에 복작거린 다음날은 후유증이 그렇게 오곤 한다.

빨래를 개고 화분에 물을 주고 시 한 편을 캘리로 옮긴다. 그러다가 멍하니 창밖을 내다보니 소리가 가만가만 움직이는 게 느껴진다. 그녀가 아니었으면 느끼지 못했을 즐거움.《산책을 듣는 시간》(정은 글, 사계절)의 주인공인 수지는 나에게 또 다른 세상을 보여준다.

그녀는 소리를 듣지 못한다. 아예 소리를 못 듣는다는 게 뭔지 잘 모른다. 늘 그래 왔으니까. 아기 때부터 수화로 대화를 나눴고 수화로 세상을 배웠다. 입술의 모양과 손짓과 눈빛으로 대화하는 것은 아름답다. 뜨개질하듯이 손으로 말을 엮고 서로의 눈과 입술을 보며 집중하는 게 좋았던 그녀는 사실은 집 안에서만 행복했고 배려받았고 안전했다.

집 밖으로 나온 그녀는 늘 커다란 헤드폰을 쓰고 다닌다. 사람들은 가게에서 계산할 때 점원의 말을 못 알아들어도, 뒤에서 길을 묻는 사람의 목소리를 못 들어도 그녀를 탓하지 않는다. 하지만 헤드폰은 장식이고 소리를 못 듣는다는 사실이 밝혀지는 순간 동정과 적대감을 나타냈다.

결국 그녀의 엄마는 인공 와우 수술을 시키기로 결심한다. 이 세상에는 귀가 들리지 않는 사람도 있는데, 그건 못 듣는 게 아니라 안 들리는 능력이 있는 거라고 말하던 엄마였다. 모두가 가지고 있는 능력이 아니라 특별히 안 들리는 능력이 더 있는 거니까 축복받은 거라고 말했던 것을 어느새 잊은 거다.

수술은 성공했지만 소리가 들린다는 것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나빴다. 그녀는 소리가 들린다기보다는 소리가 온몸을 때리는 것 같은 고통을 느낀다. 어느 누구도 귀담아 듣지 않았던 말, “왜 내가 그걸 원할 거라고 생각하죠?” 일방적인 결정의 결과는 오롯이 그녀의 몫이다.

탈출구를 찾던 그녀는 시각 장애인 친구와 ‘산책을 듣는 시간’ 프로그램을 만든다. 음악이 없는 카페에 앉아 고요와 평화를 얻은 이후다. 산책하는 사람들의 즐거운 표정을 보니 자신도 친구와 걸었던 그 시간이 가장 행복했다는 깨달음이 왔던 거다.

직업이나 나이 등 개인적인 질문을 하지 않고 그냥 같이 걷는 이 프로그램은 의외의 성공을 거둔다. 눈을 감고 걷는 등의 방법을 통해 내면에 있지만 자각하지 못하고 살았던 낯선 감각을 다시 만날 수 있는 기회를 얻었으니 만족도가 높을 밖에.

‘손뿐만 아니라 온전한 눈빛과 입술로 마주 보고 이야기를 나눠야만 수화다. 말로 하는 언어는 수화에 비해서 폭력적으로 느껴졌다. 한 사람뿐만 아니라 누구나 들을 수 있기 때문에. 엿들으려고 하지 않아도 들을 수 있다는 점에서 폭력적이고 다정하지 않았다.’

밑줄을 긋고 한참을 생각했다. 한쪽을 닫아야 다른 한쪽이 열리는 법. 수지가 그랬던 것처럼 주위에서 소리를 걷어내니 그제서야 눈과 코와 손끝으로 세상이 닿는다. 이랬구나! 그녀와 함께 나선 산책은 즐거웠다. 이제 그 시간을 들을 차례다. 가끔은 고요한 게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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