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가 참여하는 모임이 있다. 화자(話者)가 정한 주제로 이야기하고 질문을 던진다. 단 질문은 화자의 생명력이 살아나야 한다. 평가, 판단, 충고는 금한다. 칭찬도 자신의 소감 정도로 한다. 다들 질문이 쉽지 않다고 한다. 이렇게 생각하면 쉽다.

네. 알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등의 대답이 나오면 질문을 잘못한 것이다. 화자가 계속 자신의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질문이어야 한다. 예를 들면 어려운 시간을 어떤 마음(계기)으로 이겨내셨습니까? 저 같으면 용서하기 쉽지 않을 것 같은데 어떻게 용서하시고자 하는 마음을 갖게 되었나요? 등이다.

지난주에 한 구성원의 이야기가 있었다. 14세부터 혼자 살아 온 24세 친구다. 이야기는 안타까움과 절망으로 채워졌다. 그런데 마음이 무겁지 않았다. 생각해 보니 이유가 있었다. 이야기가 경쾌했기 때문이다.

듣는 사람 중에는 눈물을 흘리고 참는 사람도 있었지만 화자는 영향을 받지 않았다. 오히려 말에는 활기가 넘쳤다. 쥐어짜도 될 내용이지만 쥐어짜지 않았고 동정과 인정과 사랑을 구걸하지 않았다. 증폭도 과잉도 없었다. 무엇인가를 팔려는 사람은 호들갑을 떨게 되어있는데 호들갑이 없어서 좋았다.

어떠한 의도도 없었기에 그의 시간으로 온전하게 들어갈 수 있었다. 많이 이야기하지 않아서 무엇보다 좋았다. 그의 이야기는 명료했다. 삶은 고단하다. 그러나 삶이란 판돈 잃었다고 우는 것이 아니라 울게 된 그곳을 자신만의 성역으로 만들어서 소중히 여기거나 아니면 그 것들을 조롱하고 새 판을 만드는 사람의 넓이 그 만큼이라는 것이다.

나아가 삶이란 자신의 결핍을 증명 하려고 사는 것이 아니라 단지 현재를 살아가는 것이라고. 삶은 정답을 향해 가는 것이 아니고 경험하는 것이라고. 삶은 무조건 행복을 선택해야 한다고 말했다. 은혜를 받았고 깨달음이 있었다. 내안에서 생명의 싹이 올라왔다. 말이 싹을 죽이기도 하지만 싹을 돋기도 함이 증명되었다.

생각은 가볍고 행동은 경쾌하게 그리고 삶은 무조건 행복하게 살기로 작정했다. 생각을 가볍게란 소홀하거나 쉽게가 아니다. 엄숙과 진지 없음도 아니다. 가볍게는 무엇인가에 빠지지 않게다. 언제든지 환기를 할 수 있게다. 환기 없음은 생명 없음이기 때문이다.

생각은 신념이나 의지도 아니다. 신념과 의지가 어디 있는가? 고집과 억지를 착각하는 것일 뿐이다. 가벼워야 오래할 수 있다. 방향을 유지할 수 있다. 삶은 어차피 바뀌는 것이기 때문이다. 행동은 경쾌해야 한다. 경쾌는 활기를 의미한다.

‘응 알았어’하고 움직이면 된다. 움직이지 않으면 죽는다. 똥 폼을 잡으면 무거워서 경쾌하게 살지 못한다. 언제든지 떠나고 떠날 준비로 살아야 오래 산다. 들러붙어 있으면 본전도 못 찾고 존엄만 구긴다. 궁극적으로 삶은 늘 행복을 향해야 한다.

행복은 가치다. 가치는 기준과 방향이다. 우리가 이웃의 슬픔에 함께해야 하는 것도 궁극적으로는 우리가 행복해지기 위함이다. 우는 사람이 옆에 있으면 내가 행복하지 않기 때문이다. 국가에 대한 투쟁의 시작도 이렇게 하는 것이다. 연대도 이렇게 하는 것이다. 내가 도덕적이고 훌륭한 사람이어서가 아니다.

삶은 도망간다고 도망가지지 않는다 그러니 울지 말고 관점을 바꾸고 자신의 철학과 가치를 재건축해야 한다는, 삶을 충실하게 살아온 사람만이 이야기 할 수 있는 범상치 않은 통찰이다. 우리 조합의 직원이다. 이제 이사장 자리에서 내려갈 때가 거의 온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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