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책과 만나는 통로가 좁았던 시절엔 무조건 베스트셀러 목록에 있는 책을 골랐다. 많은 사람이 즐겨 찾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거다. 그러다가 좋아하는 작가가 생기면서 편애를 시작했고, 그 작가가 펴낸 책들을 읽었다고 표시할 때의 뿌듯함에 빠져 젊은 시절을 보냈다.

지금은 지인에게 추천을 받거나 책 속의 책을 챙겨 읽는 편이다. 우리는 좋은 것을 함께 나누고 싶은 공유의 본능이 있다. 그 본능을 따르면 크게 실망할 일이 없는데 그걸 확인시켜 주는 책이 바로 〈책은 도끼다〉(박웅현, 북하우스)다. 저자가 인문학 강독회를 열어 한 말을 책으로 엮은 건데 내가 읽은 책과 읽을 책을 두루 챙길 수 있어 좋았다.

일단 저자와 나는 〈그리스인 조르바〉의 매력에 푹 빠졌다는 공통점이 있더라. 그는 육체에도 영혼이 있다면서 그 육체를 먹이지 않으면 길바닥에다 영혼을 팽개치고 말 거라고 잔소리를 늘어놓는다. 그리곤 모든 사물을 처음 보는 듯, 처음 만난 듯, 처음 먹는 듯 대한다.

나는 조르바를 만나기 전에 책을 통해 얻는 지식을 곧 지혜라 여기고 가방 끈이 긴 사람에게 일방적인 무한 신뢰를 보내곤 했다. 그러다가 조르바를 만나 인생의 다른 공간을 활짝 열었으니 그에게 반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저자도 그를 애정하고 있었다.

더구나 행복한 가정은 모두 모습이 비슷하고, 불행한 가정은 모두 제각각의 불행을 안고 있다는 〈안나 카레리나〉의 첫 문장을 그도 기억하고 있었다. 결혼을 해서 가정을 꾸린 사람들은 이 한 문장에 담긴 녹녹치 않은 무게와 깊이를 잘 안다.

삶에 느닷없는 우연이 있을까. 알고 보면 그 스침도 내가 만든 건 아닐는지. 그래서 이제 불혹을 넘긴 저자는 흔들리지 않는다고 했다. 다른 곳에 답이 있는 걸 알지만, 자신이 사는 인생에도 답이 있는 걸 알게 되었다는 이유를 덧붙여서.

그가 책의 제목을 ‘우리가 읽는 책이 우리 머리를 주먹으로 한 대 쳐서 우리를 잠에서 깨우지 않는다면 도대체 왜 우리가 그 책을 읽어야 하는 것이냐. 책이란 무릇 우리 안에 꽁꽁 얼어버린 바다를 깨뜨리는 도끼가 되어야 한다.’는 카프카의 말에서 빌려 온 이유를 알겠다.

그러니 그가 풀어놓는 이야기를 들으며 아직 읽지 못한 책을 주섬주섬 챙긴 이유는 그가 말한 책 속에 나를 움직일 글이 있다는 걸 안 까닭이다. 그 이후 김훈의 〈자전거 여행〉을 만나 무심코 넘긴 자연을 깊이 바라보는 시선을 갖게 됐고, 이철수의 〈나뭇잎 편지〉를 읽고 우리네 삶의 작은 조각들이 아름다운 이름으로 다시 태어나는 기쁨을 느꼈다.

읽다가 어렵다고 팽개친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다시 읽어보라고 부추겨서 어떻게 시간을 다시 내야 하나 궁리 중이다. 내 말과 글이 다름 아닌 나라는 걸 안다. 내 마음을 움직이는 글이 내 삶을 보여주는 거울이라는 것도 놀랍다. 나와 닮은 또 다른 이름을 발견하게 된 책, 관계나 소통은 얼굴을 마주 보아야 맺어지는 게 아니라는 깨달음을 준 책, 〈책은 도끼다〉.

처음 듣는 이름이고 처음 읽는 글이었지만 마치 몇 십 년을 만난 지인처럼 푸근하고 넉넉한 기분이었던 건 책으로 통했다는 단 하나의 닮은 점 때문이다. 나는 지금 그 닮은 얼굴을 얼마나 만날 수 있으려나 기대되는 계절을 보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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