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 되니 괜히 싱숭생숭하다. 단풍에 물든 설악산이 텔레비전에 나올 때마다 나도 그 산에 올랐었다고 뿌듯해 하지만 이미 까마득히 오래 전 이야기. 참 무모했던 시절이었다. 높이 1,708m에 이르는 산을 청바지에 운동화 차림으로 등산 배낭도 없이 친구들과 올랐으니 말이다.

김밥 한 줄 먹고 오전 10시쯤 시작된 등산은 오후 8시가 돼서야 끝났다. 대청봉에서 인증 사진만 찍고 부지런히 발길을 재촉했는데도 가을 숲은 이내 깜깜해지지 뭔가. 당황하던 차에 뜻하지 않은 도움을 받았다.

지나던 길에 우리를 본 분들이 렌턴도 없이 덜렁덜렁 오른 대책 없는 청춘들을 안전한 곳으로 내려갈 때까지 지켜주셨다. 나는 그 날 산행을 할 때는 물은 기본이고 오이나 초콜릿 등 먹을거리를 챙겨야 한다는 등의 지혜를 배웠다.

그렇게 시작된 등산에서 낯선 사람 혹은 동행하던 사람에게 받은 친절은 수도 없이 많다. 그런 좋은 추억 덕분에 나는 ‘산’을 떠올리면 편안하고 정겹다. 누군가 《나를 부르는 숲》(빌 브라이슨 글, 홍은택 옮김. 까치)을 추천했을 때 군말 없이 기쁘게 받아들인 것도 그래서다.

유명한 여행 작가인 저자는 자기가 태어난 곳의 아름다움에 몰입하기 위해 애팔래치아 종주를 선택한다. 위기에 빠진 숲의 아름다움을 더 늦기 전에 경험하고 싶다는 생각과 무엇보다 게을러 터졌던 수 년 간의 생활을 바로 잡아야 한다는 위기감도 한 몫 했다.

그런데 14개 주를 관통하고, 무려 5개월이 걸리는데다 500만 번의 걸음을 내딛어야 하는 길이 수월할 리가 없다. 그는 결국 성공하지 못한다. 애팔래치아 숲길의 길이가 3,448km인데 그가 주파한 길이가 겨우 1,392km였으니 절반도 안 되는 거리인 셈이다. 우리는 그의 실패한 도전에서 뭘 배워야 할까.

그는 이름만 친구로 남아 있는 고향 친구 카츠와 동행한다. 둘 다 마흔네 살이고, 잘 잊는 성격에 치질과 척추 이상을 앓고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지만 그 몇 가지 공통점이 무슨 도움이 되었겠는가. 둘은 수없이 삐걱거린다. 하지만 종주하는 동안 쌓인 경험이 그들을 단단히 묶는다. 웃음도 울음도 나눌 대상이 있어야 깊어지는 법, 결국 사람이 답이란 정답을 얻는다.

그리고 ‘투쟁의 자리에서 멀리 떨어진’ 고요한 권태의 시간과 장소에 놓인 존재가 되어 보라는 충고에 귀를 기울이게 된다. 애팔래치아 종주의 백미는 ‘상실’에 있다. 스스로를 철저히 일상생활의 편리함에서 격리시키고 어떤 약속이나 의무에서 벗어나게 하면, 비로소 삶의 단순함이 명징하게 떠오른다는 것이다. 때때로 자신이 있어야 할 곳에서 벗어나야 보이지 않던 게 보이고 인생이 흥미롭게 느껴질 거란 얘기다.

산에서 만났던 사람들이 왜 타인에게 쉽게 친절을 베풀고, 인사를 건네고, 생각이 깊은 표정을 하고 있었는지 알겠다. 묵묵히 걸으며 누구를 미워하거나 해칠 생각을 할 수는 없으니까 그랬던 거다. 오랜만에 산을 찾을 계획이다. 올라가면 내려오는 지혜를 배워 아등바등 욕심내던 마음을 많이 덜어낼 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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