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위해 살다간 희생치고 홀대받는 현실 너무 안타까워
얼마 전 별세한 미망인 사연 얘기할 때 눈물 흘리며 '탄식'
'보훈의 달 위안행사' 아쉬워..시에서 적극 나서야 주문

선부동 보훈회관에서 만난 손장수 대한민국 전몰군경미망인회 안산시 지회장은 6월 26일에 있을 '보훈의 날 위안행사' 준비에 여념이 없었다. 그는 연설문을 정리하고 특히 정치인들에게 전달할 내용을 꼼꼼히 살피고 있었다. 손장수 지회장이 사무실에서 인터뷰를 마치고 밝은 표정을 짓고 있다.

지난 8일 선부동 보훈회관에서 만난 손장수 대한민국 전몰군경미망인회 안산시 지회장은 6월 26일에 있을 '보훈의 날 위안행사' 준비에 여념이 없었다. 그는 연설문을 정리하고 특히 정치인들에게 전달할 내용을 꼼꼼히 살피고 있었다. 경북 경산 출신인 손 지회장은 대위였던 남편 박정환씨를 만나 세딸을 두고 행복한 나날을 보냈다. 하지만 남편이 1998년 위암으로 세상을 떠나 이별하는 아픔을 겪었다. 지난 2000년 전몰군경미망인회와 인연을 맺은 그는 2004년 윤여옥 당시 지회장의 잔여임기를 시작으로 지금까지 제 7대째 회장직을 이어오고 있다. 안산에 300여명의 미망인들이 남편의 목숨값으로 받는 연금으로 어렵게 살아가고 있다는 손 지회장은 나라를 위한 희생에 비해 국가가 주는 혜택은 너무나 미약하다고 했다. 얼마전 별세한 미망인을 생각하면 가슴이 미어진다는 그는 안산시 등도 이들에 대한 보다 깊은 관심과 성찰이 있어야 한다고 힘주어 말했다. 보훈의 달 6월에 그를 만나 허심탄회한 얘기를 들어봤다.

Q안산 전몰군경미망인회 조직과 역사가 궁금하다.

-모두다 알다시피 이 조직은 전몰·순직 군경의 처(부인)로 된 보훈단체다. 1983년 안양시 직할 안산시 분실을 설립한 뒤, 같은해 11월 안산시 출장소가 만들어졌다. 이후 1989년 안산시 지회로 승격하면서 1994년 중앙동에서 올림픽 기념관으로 이전했다. 그 뒤 2003년 12월에 지금의 보훈회관 공사를 시작했으며, 2004년 12월 이자리로 입주했다. 200여명의 회원으로 시작해 지금은 300여명의 회원들이 미망인회에 가입돼 있다.

전몰군경미망인회 안산시 지회 회원들이 지난 6월 1일 대전 현충원을 찾아 경건한 마음으로 헌화하고 있는 모습

Q미망인회와는 언제부터 인연을 맺었나.

-1975년 당시 육군 대위였던 박정환씨를 만나 결혼했다. 공병 출신인 남편은 1975년 비둘기 부대로 월남에 참전했으며 이후 대령까지 아주 훌륭한 장교이자 사랑하는 남편이었다. 그러나 1995년 간경화라는 병을 얻어 전역했다. 그 이후 위암으로 발전되면서 1998년 3월 남편은 안타깝게도 세상을 떠났다. 1997년에 서울 강남에서 살다가 안산 와동으로 이사왔는데 그때 부터 안산시민이 되었다. 2000년 안산전몰군경미망인회 회원으로 가입했고 나름 열심히 활동을 시작했다. 그게 미망인회와의 인연이라고 볼 수 있다.

Q지회장아라는 중책을 맡았는데.

-그렇다. 2000년 부터 평회원으로 있으면서 미망인들과 함께해야 한다는 믿음을 가졌다. 2004년 당시 윤여옥 회장의 잔여 임기를 시작으로 지회장으로 임무를 수행하고 있다. 지금까지 제7대까지 연임을 계속하고 있으니, 애정이 깊을 수 밖에 없다. 국가 유공자 유족인 미망인들의 복리증진과 권익보호를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지만 언제나 부족함을 느끼고 있다. 국가와 지방자치단체가 좀더 배려해야 하는데 늘 아쉬움을 갖고 있다. 개인적으로는 평생교육학사와 사회복지학사라는 공부를 통해 노후의 행복을 준비하고 있다. 누군가에게 베풀 수 있다는 것은 그 자체가 보람아니겠는가.

Q보훈의 달에 특별히 느끼는 것은 없나.

-얼마전 90세 초반에 세상을 떠난 미망인 얘기를 들려주고 싶다. 그는 일제 강점기에 위안부로 보내지 않으려 16살의 어린나이에 결혼을 했다. 그러자 6.25가 발발해 남편은 전쟁터에 나갔다고 한다. 얼마 뒤 휴가기간에 임신을 하고 남편은 최전선으로 복귀했으나, 1개월도 채 안돼 전사 통지서를 받았다. 결국 유복자를 낳아 길렀다고 한다. 그러나 남편의 목숨값으로 국가가 주는 예우는 그리 변변치 않다. 어렵게 유복자를 키우면서 돈 있는 남자들로 부터 유혹을 뿌리치고 한평생을 절개를 지키며 살다 돌아가셨다. 장례식장에 가서 너무나 슬퍼 엉엉 울고말았다. (눈물을 흘리면서 흐느끼는 10분동안 인터뷰가 중단됐다)

Q국가의 예우가 부족하단 말인가.

-그렇다. 국가 유공자들은 최저 생계비에도 못미치는 경우가 다반사. 70만 원에서 120만 원 정도 받고 있는게 현실이다. 국민 모두 65세가 되면 누구나 주는 노령연금도 우리 미망인들은 받지 못하고 있다면 믿을 수 있겠는가. 연금을 받고 있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정말 웃기는 얘기다.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예우치고는 너무나 지나친 홀대라고 생각한다.

Q불합리한 것이 많은 것 같다.

-미망인들이 세상을 떠나도 안산시는 별 관심이 없다. 조화라도 전달하면 얼마나 좋겠는가. 이 같은 불합리한 제도의 개선을 바라고 있는 것이다. 정말 피가 토하는 일이다. 희생단체와 공헌단체도 예우를 달리해야 한다는 것이 나의 개인적인 생각이다. 때문에 국회에서 이 같은 법률을 발의해서 미망인들의 한을 풀어주기 진심으로 바라고 있다. '국민통합'의 발로라고 생각한다.

Q보훈의 달 위안 행사에 대한 개선책은 무엇이라 생각하나.

-매년 '6월 보훈의 달 위안 행사'는 문제점이 많고 따라서 개선해야 한다고 믿고 있다. 9개 보훈 단체별로 199만 원을 지원하면서 각자 행사를 하도록 하고 있다. 모두가 알아서 하라는 얘기다.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분들에 대한 위안행사치고는 너무나 무성의한 태도다. 후세들을 위해서도 기성세대가 반성하고 새로운 방안을 마련해야 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손장수 대한민국 전몰군경미망인회 안산시 지회장의 남편 박정환 육군 중령이 묻혀 있는 대전 현충원 묘지 앞

Q그렇다면 대안책은 무엇인가.

-안산시가 주관이 돼서 많은 시민들이 참가하는 행사가 돼야한다. 이를 테면 '안산문화광장' 같은 곳에서 유명한 연예인을 부르면 시민들이 참여하게 될 것이다. 이런 가운에 안산시 보훈단체 행사를 묶어서 하게되면 어린이들도 청년들도 국가에 대한 사랑을 일깨우는 계기가 되지 않겠나. 일반 시민들은 보훈의 달 위안행사가 있는지도 모르고 지나가고 있다.

Q마지막으로 한마디 해달라.

-인터뷰에서 내가 흥분한 면이 있는것 같아 미안하게 생각한다. 이런 기회가 많지 않았다. 나도 모르게 막힌 숨통이 시원하게 뚫리는 느낌이다. 나는 경북 경산군 용성면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고향에서 보내고 영등포로 올라와 교사의 꿈을 꾼 적이 있다. 사범대를 가지 못했지만 개인 의상실을 운영하는 등 젊은 시설부터 사업 수완이 있었다. 아까도 언급했지만 듬직한 육군 장교를 만나 20년 이상을 함께 살았다. 세딸을 낳고 행복하게 살았고 지금도 마찬가지다. 사랑하던 남편을 잃고 혼자 힘겨운 날도 있었다. 지금은 대전 현충원에 묻혀있지만 늘 곁에 있다고 생각한다. 남편도 하늘나라에서 나를 지켜줄 거라 믿고있다. 다시한번 강조하지만 국가가 보훈가족에 대한 배려를 더 뜨겁게 해주길 바란다. 오직 바라는 것은 그것 뿐이다.

인터뷰=최제영 大記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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