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 「책과 삶」이라는 독서 신문에서 서평기자를 모집했다. 편집 회의를 하느라 서울을 왔다 갔다 하는 번거로움도 감수해야 되고 무엇보다 문학, 과학, 실용, 인문 등 한 분야를 맡아 관련 책을 읽고 2,000자 분량의 글을 쓰는 게 기자의 일.
나는 학생들과 책으로 놀다보니 청소년 분야를 맡는 게 좋을 것 같아서 그분야를 신청했다. 서류를 내고 면접을 보는 데 어찌나 떨리던지. 다행히 합격을 해서 2년 동안 입맛에 맞는 신간을 골라 정말 신나게 책을 읽고 글을 썼다.
그러면서도 한 편으로는 아쉬웠다.
서평은 객관적으로 책을 본다. 그래서 저자가 누구인지, 무슨 뜻을 갖고 책을 썼는지 살펴야 한다. 내용 뿐 아니라 작품 해설도 챙겨 읽어야 그 책이 가진 이런저런 특징을 말할 수 있다. 이런 이유로 깊이 있는 책읽기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그런데 나는 글에 내가 없어서 심심 했다. 서평기자를 그만 둔 이후 《문학의 숲을 거닐다》(장영희 글, 샘터)를 오래 만지작거렸다. 이 책은 저자가 2001
년부터 3년간 〈조선일보〉 ‘문학의 숲, 고전의 바다’라는 북 칼럼에 게재한 글 을 모은 것이다.
칼럼을 처음 시작할 때 신문사측은 저자에게 이렇게 주문했다. “선생님의 글을 보고 독자들이 ‘아, 이 책을 한 번읽어 보고 싶다.’하고 도서관이나 책방 으로 뛰어가도록 해 달라.”고. 서강대학교 영문학과 교수였던 저자는 원고지 10매로 어떻게 독자들의 마음을 움직 일까 고민했다.
그리곤 고전을 분석하기 전에 그 작품이 자신의 마음에 어떻게 와 닿았는 지, 어떤 감동을 주었는지, 그래서 그 작품들로 인해서 자신의 삶이 얼마나 풍요롭게 되었는지 솔직하게 쓰자고 생각 했다.
저자가 이 책을 ‘문학 에세이’라고 칭한 까닭은 그가 느낀 현실세계의 아름 다움과 누추함을 고전적인 문학세계와 비교 분석해서 의미화 한 후, 우리들의 삶에 새로운 충격을 던짐으로써 각자서 있는 자리를 되돌아보게 해 주기 위해서다.
그는 어릴 때 소아마비를 앓아 평생 장애인으로 살았다. 유학 시절에 동생과 쇼핑을 나섰는데 가게 입구의 턱이 높아 동생만 가게 안으로 들어가고 혼자 문밖에 서 있었다. 그랬더니 주인 여자가 나와서 “동전 없어요.” 하더란다. 그제서야 주인 여자가 자기를 거지로 착각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기가 막힐 일인데 걸인 시인으로 알려진 윌리엄 헨리 데이비스의 〈가던길 멈춰 서서〉 전문을 소개하며 이렇게 덧붙인다. 까짓, 동전 구하는 거지로 오인되면 어떠냐. 이 아름다운 봄날 가던 길 멈춰 서서 나뭇가지에 돋는 새순을 한 번 만져 보고 하늘 한 번 올려다볼 수 있는 여유가 있으니 이 얼마나 축복인가.
《문학의 숲을 거닐다》는 ‘인간 장영희’가 문학의 숲을 함께 거닐며 향기 로운 열매를 향유하고 이 세상이 더 아름다워 질 수 있다는 믿음을 나누고 싶다고 내미는 초대장이다. 이 책이 단순한 북 칼럼이었다면 정보만 듬뿍 얻자고 선뜻 따라나서지는 않았을 것 같다.
문학의 숲엔 향기 나는 사람이 서성거 려야 제 멋 아닌가.
얼떨결에 내가 책을 이야기하고 있다. 나를 움직인 책만 찾다 보니 쉽지 않고, ‘인간 황영주’를 섞으려니 멈칫할 때가 있다. 그래도 내숭을 떠는 건 질색이니 용기를 낸다. 부족하고 어리석고 덜자란 어른이지만 책과 뒹굴다 보면 언젠가는 참 사람이 되는 날 오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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