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도에 대하여

이재호대표(들꽃청소년세상)

 

청소년에 대한 교육에 헌신하셨던 문동환 목사님이 쓰신 자아확립(1972,대한기독교서회)이라는 책의 서문에는 다음의 글이 있다. “무엇보다 인간답게 살아야 한다. 인간답게 사는 것은 늘 시대마다 다르다. 그래서 인간답게 사는 것이 어렵다. ........ 그대들은 나름으로 계속 생(生)과 씨름하라. 진리와 대화하라. 하나님과 교통하라. 그리고 그대들의 보고서를 쓰라. 앞으로 나올 그대들의 보고서를 기다리며 나의 보고서를 쓴다. 나를 오늘의 나로 설 수 있게 해주신 모든 ‘너’들에게 감사하면서.”

지난 9일 선생님이셨던 문동환 목사님이 소천하셨다. 2년 전 추석에 다녀 온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아쉽고 아쉬운 일이지만 담담하게 애도해야 한다는 생각이다. 애도의 사전적 의미는 사람의 죽음을 슬퍼함이다. 자크 데리다라는 사람은 애도를 인간이 갖는 최상의 행동으로 말한다. I mourn therefore I am. 나는 애도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자크 데리다가 이야기 하는 진정한 애도란 슬퍼함 속에서 그 슬픔 바깥을 지향한다. 절망의 현재에서 가려고 했던 그 곳을 지향한다. 슬픔을 과거의 시간이 아니라 지금 여기의 사건으로 계속 살아있게 하는 행위이다. 슬픔이 존재로 가졌던 바로 그 生과 사상을 기억하는 행동이다. 이것이 데리다가 정의하는 애도이다. 한마디로 애도란 살아있는 사람이 죽은 이가 갖고 있었던 시간, 삶과 함께 살아간다는 의미이다.

2014년 4월 16일에 안산에서는 집단적 슬픔이 있었다. 250명의 청소년이 한 날 한 시간에 사랑하는 사람과 떠난 것이다. 모든 집단적 죽음의 일차적 책임은 명백하게 국가이다. 그 다음이 사회이다. 그리고 인간의 윤리적 차원으로는 우리 모두의 책임이다. 애도는 우리가 인간이 이상 우리 모두의 책무인 것 이다. 조금 있으면 416의 5주기다. 애도의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 늘 이때가 되면 스스로 질문하게 된다. 우리는 그들을 어떻게 애도할 것인가? 분명한 것은 누구도 한 번의 슬픔으로 그들에 대한 애도를 다했다고 말하지 않을 것이다. 한 번의 기념식으로 충분하다고 말하지 않을 것이다. 다양한 퍼포먼스가 애도라고 말하지 않을 것이다.

얼마 전 세월호에서 아이를 떠나보낸 부모님과 대화를 나누었다. 먼저 보낸 아이를 생각하면서 자신들이 가진 새로운 교육의 청사진을 보여주셨다. 성과에 관계없는 훌륭한 애도였다. 진정한 애도의 성공이었다. 나는 최선을 다해 돕겠다는 이야기 외에 할 말이 없었다. 나는 부모님과 헤어진 후에 다시 한 번 다짐한다. 2014년 4월 16일 304명의 죽었던 그 이유를 밝히는 일에 대해. 그리고 304명에 대한 기억을 사회화하는 생명안전공원을 세우는 일에 대해. 그들이 살아가고자 염원했던 세상을 가꾸어 가는 일에 대해. 그리고 416에 대한 우리 모두의 애도가 우리와 우리사회에 기여했던 영향에 대해서 멈추지 않고 애도 할 것이다. 이것이 무엇보다 나에 대한 우리에 대한 416 애도의 완성이라고 믿는다. 나를 오늘의 나로 설 수 있게 해주었던 모든 ‘너’들에게 감사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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