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래기를 만들며

심명옥/안산문인협회 재무국장

햇살 맑은 하루, 엄마의 텃밭에선 가을걷이가 한창이다. 갑자기 추워진 날씨 탓에 서둘러 뽑아 놓은 무 한 무더기가 가을볕에 널브러져 있다. 잠깐 들렀다 가리라는 계획을 통째로 수정해 엄마의 몸빼로 갈아입고 밭에 주저앉는다.

옹기종기 모여 추위를 피해 있는 무들이 싱싱해 보인다. 무를 한입 베어 물면 입 안 가득 달달함이 차오를 것 같다. 얼기 전에 서둘러 집안으로 들여야 한다. 엄마는 일이 많아질 것 같으니 무청은 버리고 무만 들이자고 하신다. 엄마 말씀대로 무만 자루에 담으려고 하니, 뚝뚝 떨어져 나가는 푸른 무청들이 제 살점 떨어져 나가는 것만큼이나 아깝다.

안 되겠다 싶어 아무렇게 던져졌던 무청들을 가지런히 쌓아놓으며 시래기 만들 거라 큰소리친다. 내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눈치 백단 남편과 센스 만점 오빠는 군불 지피기에 바쁘다. 밭가에서 이게 맞다 저게 맞다 티격태격 군불 지피는 모양이 톡톡 튀는 화톳불을 닮았다. 소년처럼 맑고 귀여운 모습들, 물수제비 뜬 돌이 내게로 튀어온다.

불장난 하나로 환히 웃는 저들에게도 무엇인가를 책임지지 않고 홀로 푸르렀던 시절 있었다. 쨍그랑 유리 깨지는 소리 요란했어도 엄마 배경 믿고 하고 싶은 대로 장난 치고 웃기만 하면 되는 시절 말이다. 지나가는 여학생에게 물 풍선을 던지기도 했을 테고, 긴 그림자가 골목길을 꽉 채우도록 노는 데 정신 팔리기도 했을 테다. 시간에 떠밀려와 지금은 먹고 사는 문제에 짓눌려 싱싱한 물기를 다 빼버렸지만 한때 저들도 소년이었다.

열심히 군불을 지핀 두 남자 덕분에 예상보다 빨리 펄펄 끓는 물속에 무청을 넣는다. 뜨거운 물에 생기를 빼내 숙성의 시간을 준비하기 위한 통과의례다. 커다란 가마솥 안으로 빨려 들어가는 무청을 물끄러미 바라보는데, 그 옛날 부지런히 밥상을 차리던 엄마 얼굴이 떠오른다. 시래기 만드는 일조차도 겁내는 엄마 모습에 새삼 세월의 흐름을 실감한다. 코끝이 시큰해지는 건 순전히 공중으로 피어오르는 연기 탓만은 아니리라.

어떻게 처리할까 고민했는데 잘됐다며 흡족해하는 엄마 얼굴엔 대견함이 가득하다. 어느 새 시간의 중심축은 엄마에게서 나에게로 옮겨져 와 있다. 엄마의 아이였던 시절에 투정만 일삼았던 내가 이제 시래기를 만들고 있다. 청국장 띄우는 냄새가 싫었고, 무말랭이 뒤집는 게 귀찮았던 내가 엄마의 시간에 완벽히 들어와 본 후에야 내어주는 삶의 깊이를 이해한다.

누구에게나 아이였던 시절이 있다. 오래 전에 엄마가 건너갔고, 두 남자와 나도 아이였던 시간을 가볍게 건너왔다. 무청의 싱싱함과 동격인 팔딱이는 시간들 속에서 우리는 저마다 맑게 웃었다. 나 아닌 가족을 챙기면서, 즉, 삶의 경건한 책임에 열중하면서 우리는 자연스레 햇살처럼 빛나던 시간들을 기억에서 지워버렸다. 누군가의 부모가 된다는 건, 뭉근하게 자기를 누르며 구수한 맛을 우려내는 과정인가 보다.

창업 이래 가장 어려운 시기를 보내고 있는 남편의 한숨소리가 깊다. 자존심 센 사람이어서 티 안 내려고 노력하지만 월급날이 가까워오면 헛웃음소리가 커져간다. 7년 전 상처한 오빠도 올케언니의 빈자리 채우느라 안팎으로 바쁘다. 나와 반찬 만드는 얘기를 주고받을 정도로 주부생활이 익숙해졌지만 가정 경제까지 책임져야 하는 오빠의 짐은 여전히 무거워 보인다.

그래도 저들은 묵묵히 일터로 나간다. 내 부모가 그랬듯 기꺼이 개인적인 열망을 누르고 누군가를 책임지려고 일을 한다. 생의 화려한 기억을 지우고 차가운 묵상의 시간을 거친 후에야 진가를 발휘하는 시래기처럼 어려움 속에서도 끊임없이 자기를 내어주며 삶의 맛을 완성해 나가고 있다. 우리들의 삶은 색 바래고 바싹 마른 겉모양에 한때는 푸르렀던 시간을 박제해 놓고 깊은 맛을 내는 시래기의 존재 의미에 가 닿아 있다.

삶아진 무청들을 지하수에 담갔다가 건져내 줄에 거는 손길이 바빠진다. 투명한 햇빛에 잘 말려 두면 오래도록 밥상을 책임져 줄 것이다. 시래기가 다 되면 엄마 모셔다 구수한 밥상 한 번 차려드려야겠다. 후루룩, 벌써 한 뚝배기 끓였는지 입 안 가득 침이 고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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