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산문인협회 재무국장

작달막한 키에 비쩍 마른 몸, 그리고 목청껏 불러야 겨우 알아듣는 청력을 가진 여든여섯의 사내. 한때는 막걸리를 통째로 마시고, 마을 여자 꽤나 울렸던 건장한 사내는 스크루지 닮았다고 하기엔 조금 별난 구두쇠였다. 이 양반, 밖에 나가서는 온갖 선심 쓰며 사람들을 자기편으로 만드는데, 집에만 오면 10원짜리 하나도 허투루 쓰는 걸 못 견뎠다.

남편과 달리 쓰임새 컸던 아내는 일주일에 한 번 있는 가계부 검사하는 날을 개학식 날 일기장 검사 받듯 싫어했다. 그도 그럴 것이 가계부 검사하는 날에 큰소리가 담장 밖을 넘지 않은 날이 없었고, 두부는 몇 모 샀냐, 이건 뭐냐, 저건 뭐냐 시시콜콜 어찌나 따져 묻던지 제아무리 용빼는 재주 있어도 사내 당해낼 재간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진짜 단돈 100원도 못 꼬불쳤냐 하면 그건 또 아니어서 이건 어디까지나 뛰는 놈 위에 나는 놈이었던 그 아내도 겉으로 보기엔 순종적이어도 강단 꽤나 있는 여자라 할 수 있다.

사내는 슬하에 4남매를 두었는데, 돈 때문에 얼마나 들들 볶았는지 아이들은 허구한 날 의기소침해졌다. 4남매 중 제일 서러운 사람이 셋째였으니, 오빠 언니 다음으로 세상에 태어난 것을 탓할 수밖에. 아들도 아니요, 큰딸도 아닌 딸에게 구두쇠 아버지의 돈이 풀릴 리 없었다. 뚫린 고무신이나 헤진 운동화 신고 다니는 건 기본이고, 육성회비나 수업료도 반에서 늘 꼴찌로 냈다. 셋째는 겨울 코트 없이 얇은 동복으로 매운바람을 이겨내야 했던 기억도 아리게 갖고 있다.

평생을 아끼고 모으느라 뒤돌아볼 겨를 없던 사내였다. 사내의 돈 아끼기의 압권은 뭐니뭐니해도 고스톱을 칠 때 발휘된다. 고스톱 치는 것을 좋아하는 사내는 멤버가 구성되는 것 같으면 은근슬쩍 판을 깐다. 자식들이 허리가 아프든 말든 아내의 강력한 만류가 있을 새벽까지 고스톱을 치는 데 여념이 없다.

사내와 함께하는 고스톱판이 얼마나 불공정한 놀이판인지 일일이 열거할 수 없다. 잃을 거 같으면 얼굴이 금세 칠면조로 변하기에 자식들은 접대 골프 치듯 고스톱을 쳐야 한다. 피박을 써도 사내는 모른 척 적은 돈을 건넨다. 그뿐이랴. 아무리 판을 키울 수 있어도 사내가 점수를 만회할 기회가 안 보이면 알아서 ‘stop'을 외쳐야 한다. 한마디로 go와 stop을 잘 외쳐야 하는 것이다. 다 끝나면 나온 판돈 모두는 당연히 사내 주머니 속으로 들어간다. 자식들이 챙겨 주는 판돈을 못 이기는 척 받아 넣는 표정이 환한 달빛이다. 감정의 파고를 여러 번 넘으면서도 결국 승자는 매번 사내인 셈이다.

‘저렇게 돈이 좋을까?’ 가끔 의문을 갖지만 워낙 몸에 밴 분이라 국어사전 풀이처럼 인정해 버리고 만다. 그런데 그렇게 모은 돈에 엄청난 비밀이 숨어 있었음을 자식들은 나중에야 알았다. 사내는 수십 년 세월 동안 자식들한테 받은 돈만큼은 철저히 따로 모아 두었는데, 이유인즉슨, 먼길 떠날 때 장례식을 치룰 돈이란다. 자식들에게 받은 돈이기에 의미 있게 쓰고 싶댄다.

더구나 사내는 천 원짜리를 깨끗이 모아 영정 사진 밑에 엄청 쌓아놓았다. 배웅하는 동안 고스톱 비용으로 쓸 용도란다. 울컥하는 감정을 오지랖이라고 에둘러 표현하면서도 셋째의 눈가엔 어느 새 눈물이 맺힌다. 나이가 나이인 만큼 이별 연습을 하는 사내를 이해하면서도 인정하고 싶지는 않은 거다.

죽으면 영혼이 새가 되어 몸을 빠져나간다던데 얄궂게 사내는 영혼이 되어서도 고스톱 치는 모습을 구경하고 싶은가. 나이가 들면 절로 지혜가 생기는 건지, 죽음을 구체적으로 준비하는 모습에 셋째는 경건함을 느낀다. 심폐 소생술을 거부하거나 즐겁게 보내 달라고 판돈을 챙겨 놓는 모습에선 죽음에 대한 공포감을 뛰어넘어 거룩함을 느끼기에 충분하다. 참으로 의연하다.

"이만하면 잘 살았다. 언제 가도 원이 없다."고 말하는 사내 얼굴은 참으로 맑아 보인다. 늙고 빈약한 모습에도 한없이 사랑스런 모습이다. 조실부모해서 안 쓰고 모으는 것만이 최선이라고 생각한 사내. 악착같이 살림을 일구는 동안 아내나 자식에게 원망을 많이 들어 한때는 외로워하기도 했었는데, 끝까지 웅숭깊은 마음 한 자락에 가족에 대한 큰 사랑을 심고 있다.

사내는 지금 즐겁게 이별하는 법을 가르치고 있는 중이다. 별난 사내의 고도의 전략 덕분에 자식들은 장례식장에서 고스톱판을 많이 깔아야 할지도 모를 일이다. 고도리의 멋진 배웅을 받으며 훨훨 날아가는 날, 과연 사내의 바람대로 남겨진 사람들은 환히 웃을 수 있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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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쓴 지 일 년 후, 여든일곱의 나이로 사내는 훨훨 날아올랐다. 간곡했음에도 아무도 사내의 부탁을 들어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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