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의 조국 근대화를 이뤄낸 것은 1970년대 새마을 운동이다.

농촌개발 사업에서 시작하여 건설과 정치로까지 발전되었다. 당시에 농촌에는 전기가 들어가지 않아 등잔불로 어둠을 밝혔고 초가지붕과 우물은 농촌의 전형적인 상징물이었다. 비포장도로는 말마차가 지나가기도 했고 드물게 차량이 지나갈 정도로 한산했다. 당시 학교에는 급식으로 옥수수 빵이 있었는데, 이는 당시 배고픈 상황을 상징적으로 말해준다. 그 당시 가장 시급했던 것은 의식주를 해결하는 것이었다. 새마을 운동을 통해 주택건설 지원과 전기 보급 그리고 농기계가 도입되어 농촌이 변하기 시작하였고 배고픈 가난을 넘길 수 있었다.

당시 가족의 규모는 대가족으로 삼대가 함께 가정을 이루며 살았다. 비록 형편은 어려웠지만 소박한 사랑의 공동체인 가정은 어느 집단 보다 행복했고 훈훈한 가족의 정을 느끼기에 충분했다. 온가족이 옹기종기 모여 소박한 꿈을 나누며 서로의 아픔과 기쁨을 함께 나눴기에 가족은 무엇보다 소중했다.

요즘 물질적인 풍요와 상상을 뛰어넘는 수많은 공산품들이 가득해 있고 수많은 편의시설 등은 인간의 욕구를 충족시키기에 부족함이 없을 정도이다. 이러한 것을 생각만 해도 감동과 감사가 있을 법한데, 불평과 불만이 쌓여가고 있다.

가난을 겪었던 사람들에게는 현실은 분명 꿈과 같은 세상이라고 말할 수 있는데 정작 감사를 느끼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다. 이는 한계효용체감의 법칙에서 볼 수 있듯이 아무리 좋은 것도 적당히 있을 때 감사함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벤자민 플랭클린이 말했듯이 은혜는 모래위에 새기며 원한은 대리석에 새기는 경향이 있다며 은혜를 바위에 새기고 원한을 모래위에 새겨야 한다는 말이 가슴에 와 닿는다. 제퍼슨은 과거의 은혜를 회상함으로 감사가 태어난다고 했다. 은혜를 모르면 감사가 나올 수 없는 것이다.

사람들은 태어나면서부터 자랄 때까지 부모와 사회의 도움이 필요하며 모든 생명을 지켜주시는 하나님의 보호하심 속에 호흡하며 건강을 유지할 수 있다. 그런데 받은 은혜를 느끼지 못하기 때문에 불평과 불만 속에 살고 있는 것이다.

핵가족 시대의 부모는 자녀에 대한 사랑과 기대가 남다르다. 자녀의 필요를 다 채워주려고 노력하며 또한 자녀를 통해 대리만족을 얻고자한다. 그러다 보니 자녀들에게 동료들과 함께 가기보다는 주변을 돌아보지 말고 앞만 보고 달려가라고 말한다. 그렇게 자란 자녀들이 장차 사회에 어떤 사람이 될지 생각해보자.

서울소재의 유명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공부를 왜 하는지에 대한 설문이 있었는데 대부분이 좋은 직장, 명예, 돈, 결혼 등을 위해 공부를 한다는 응답이 대부분이었다. 이러한 질문에 대해 철학적인 거창한 대답을 기대한 것은 아니더라도, 최소한 지금까지 자라오면서 받은 은혜에 대한 보답을 하고자 공부한다고 답변하는 사람들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싶었다.

학교 현장도 사제지간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공동사회가 아닌 이익사회로서 변모해가는 것을 볼 수 있다. 큰 은혜보다는 작은 원한으로 존경이 아닌 오히려 섭섭함과 미움을 느끼는 현실이다. 라 로슈푸코는 사람은 거의 모두가 조그마한 은혜에 보답을 하고 기뻐한다. 많은 사람들이 중간 정도의 은혜를 감사하게 생각한다. 그러나 큰 은혜에 대하여 의리를 저버리지 않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한다.

우리 모두 자신들에게 가장 큰 은혜를 베풀어 주신 부모님과 방황과 갈등의 시절에 부모처럼 자신들을 돌봐주신 선생님들의 은혜를 기억하는 5월 감사의 달이 되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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