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소 논설위원

 

인간 사회서도 마찬가지지만 새들의 세계에도 비정한 부모는 있기 마련이다. 박새처럼 하루에 600회 이상 날아다니며 벌레를 잡아다 새끼를 먹이는 참 어버이가 있는 반면, 둥지를 만들지도 않고 달랑 알만 낳고는 새끼를 거두지도 않는 뻐꾸기 같은 놈이 있기 때문이다.

여름 철새인 뻐꾸기는 5월부터 8월 사이 우리나라 전역의 숲속에서 좋은 노래를 부르며 머무르는데 노래 소리와는 반대로 뻔뻔스런 새로 알려져 있다. 일명 숙주새의 둥지에 자신의 알을 슬쩍 낳아 놓고는 성장할 때까지 자신은 빈둥빈둥 노는 새가 바로 뻐꾸기이기 때문이다.

이런 일이 가능한 것은 일반적으로 새들은 큰 알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어 자기의 알과 뻐꾸기의 알을 구분하지 못하고 오히려 뻐꾸기의 알을 열심히 품어 일찍 부화시키기 때문이다. 이렇게 일찍 부화된 뻐꾸기 새끼는 숙주새의 알들을 밀어내 땅으로 떨어뜨리거나 먹이를 못 받아먹게 한다. 주객이 전도된 이런 행태가 가능한 것은 덩치가 큰 뻐꾸기 새끼가 소란스럽게 울어대면 숙주새들은 본능적으로 먼저 먹이를 주기 때문이다.

이렇게 새끼들의 필사적인 생의 다툼이 계속되는 동안 뻐꾸기는 노래를 부르며 한껏 놀다가 새끼가 다 성장하면 숙주새가 둥지를 비운 사이 몰래 와서 새끼를 빼내 도망가 버린다.

글쎄 이러한 것들이 자연에 순응하며 살아가는 순리인지는 모르지만 인간 사회와 비교해보면 남의 일 같지가 않다. 후한의 곽거는 가난한 가운데 연로한 부친이 자신의 몫을 손자에게 자주 주자 “차라리 아이를 구덩이에 묻어 버리고 말자, 자식은 또 다시 낳을 수 있으나 부모는 다시 얻을 수 없으니까” 했다지 않은가.

또한 옛날 초국의 노래자는 늙은 양친을 즐겁게 해 드리기 위해 칠십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색동옷을 입고 재롱을 부렸는가 하면, 한나라 당상은 얼음장을 녹여 잉어를 잡아 계모의 병상에 받쳤다는 기록이 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대가족 사회에서 있었던 이러한 끈끈한 정들이 핵가족화 되면서 하나둘 붕괴되는 느낌이 든다. 변화하는 사회야 어찌할 수 없다 하더라도 부모와 자식과의 관계마저 계약적이고 의무적인 것으로 변질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최근 뉴스를 보면 어찌 세상에 이런 일도 있나싶어 나도 모르게 흥분을 하게 될 때가 많다. 무너지는 가족, 상상을 초월해 일어나는 가족들의 이야기를 보며 뻐꾸기의 삶이 떠오르는 것은 이게 새의 이야기만이 아닌 우리 자신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부모를 죽이는 일이나 혹은 남편을 죽이는 일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나는 사회에 대해 더 이상 반응을 보이지 않고 당연하듯 사는 우리네 삶이 더 초라해 보인다.

5월 가정의 달이다. 경제도 중요하지만 가족이 해체되는 사회 문제도 되돌아봐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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