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려지는 라면에서… 존재를 담아내다
라면은 가장 일상적인 음식이자, 가장 쉽게 소비되고 버려지는 재료다. 작가 이채현 작가는 그 라면을 삶아 말리고, 붙이고, 쌓는 과정을 반복하며 하나의 조형적 존재로 만들어왔다. 가볍고 부서질 것 같던 재료는 시간과 노동을 거치며 혼자 들기조차 버거운 무게를 갖는다. 그의 작업은 그렇게 ‘버텨온 시간’과 ‘존재의 무게’를 시각화한다.
이채현 작가는 전업 작가가 아니다. 생계를 위한 본업을 병행하며 작업을 이어가는 생활인 작가다. 정규 미술 교육을 받지 않은 비전공자로 독학의 길을 걸어왔고, 그 과정에서 공연, 영상, 전시, 디자인 등 다양한 예술 영역을 넘나들며 자신만의 언어를 구축해 왔다. 라면이라는 재료 역시 거창한 개념에서 출발했다기보다, 삶과 가장 가까운 지점에서 발견한 선택이었다.
그의 대표 작업 〈라면알〉은 하루하루 쌓인 반복의 결과물이다. 빠르게 성과를 내기 어려운 현실 속에서, ‘조금씩이라도 계속할 수 있는 작업’을 스스로에게 묻고 선택한 방식이다. 폐기되는 라면을 재료로 삼아 완성된 조형물은, 보잘것없어 보이는 것 또한 충분히 의미 있는 존재가 될 수 있음을 말한다.
이번 인터뷰에서 이채현 작가는 라면을 작업 재료로 선택한 이유, 장기 프로젝트를 이어온 과정, 예술과 노동의 경계에서 느끼는 현실적인 고민을 솔직하게 풀어놓는다. 화려한 수사보다 꾸준함으로, 선언보다 반복으로 작업을 이어온 한 작가의 이야기는 예술이 일상과 어떻게 맞닿아 있는지를 조용히 되묻는다.
Q1.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현재 어떤 일을 하며 작업을 병행하고 있나요?
A. 안녕하세요. 라면을 재료로 회화와 조형 작업을 하고 있는 작가 이채현입니다. 흔히 예술의 길을 ‘배고픈 직업’이라고들 하잖아요. 저 역시 생계를 위해 자동차 영업 딜러 일을 병행하며 작업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딜러 일을 하기 전에도 다양한 아르바이트와 일을 병행하며 작업을 이어왔습니다.
Q2. 작가로서 작업을 시작하게 된 계기는 무엇이었나요?
A. 어릴 때부터 꼭 화가가 되어야겠다는 꿈이 있었던 것은 아니고, 그저 그림을 보고 그리고 하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전공은 연극이었고 배우를 꿈꾸기도 했지만, 역시 그 길은 쉽지 않았어요. 힘든 시기마다 그림을 보며 많은 위로와 힘을 받았고, 그러다 보니 저 역시 그림을 통해 누군가에게 즐거움과 위로를 전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독학으로 그림을 공부하며 작업을 하다 보니 작품이 많이 쌓였고, 전시를 열게 되었습니다. 이후에는 공연과 단편영화 제작, 갤러리 운영, 디자인 의류 제작 등 예술 전반에 걸친 다양한 시도를 해왔습니다. 하고 싶은 것은 꼭 해봐야 하는 성격이라 예술 전반에 자연스럽게 도전하게 되었고, 그렇게 작가의 길로 들어선 것 같습니다.
Q3. 여러 재료 중 라면을 선택하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요?
A. 다른 작가들처럼 저 역시 다양한 소재와 재료로 실험 작업을 해왔습니다. 그중에서도 유독 라면이 눈에 들어왔어요. 꼬불꼬불한 면의 굴곡이 제 인생의 굴곡과 닮아 있다고 느꼈고, 그 형태 자체가 미학적으로도 아름답게 다가왔습니다.
라면은 저렴하게 한 끼를 해결할 수 있는 대중적인 음식이자, 누구에게나 친숙하고 고마운 존재이기도 하죠. 동시에 공장에서 대량 생산되어 봉지 속에 갇힌 채 소비되는 모습은 각박한 현대인의 삶과도 닮아 있다고 느꼈습니다. 그런 라면에 다양한 변화를 주며 자유와 희망의 메시지를 담아보고 싶었습니다.
Q4. 작업에 사용하는 라면은 어디에서 어떻게 구하고 있나요? 특정 라면을 사용하는 이유도 있나요?
A. 현재 작업에 사용하는 라면은 라면 회사 팔도로부터 유통기한이 지나 폐기되는 라면을 지원받고 있습니다. 유통 과정에서 버려질 수밖에 없는 라면이 있을 것이라 생각했고, 이를 재사용한다면 친환경적인 작업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에 먼저 회사에 제안하게 되었습니다.
감사하게도 작업용 라면뿐만 아니라 작업 중 먹을 라면까지 챙겨주셔서 잘 먹고, 잘 작업하고 있습니다. 또 주변 지인분들이 유통기한 지난 라면이 있다며 주시기도 해요. 라면마다 면의 굵기와 색이 달라 표현의 폭이 넓어지는 점도 매력입니다. 집에 유통기한 지난 라면이 있다면, 이제 버리지 말고 저에게 보내주셔도 됩니다. (웃음)
Q5. 〈라면알〉은 어떤 작업인가요?
A. 〈라면알〉은 2025년 1월부터 12월까지 1년간 이어진 장기 프로젝트입니다. 생계형 작가로서 작업에 온전히 시간을 쏟기 어려운 현실 속에서 ‘꾸준히, 조금씩이라도 이어갈 수 있는 작업은 무엇일까’라는 질문에서 출발했습니다.
라면을 삶아 말리고, 뭉치고, 그 위에 다시 라면을 얇게 펴 올리는 과정을 반복하며 형태를 만들어 갔습니다. 처음에는 손에 쥐기에도 가벼운 보잘것없는 라면 덩어리에 불과했지만, 하루하루 쌓인 시간은 결국 형태와 무게를 갖추게 되었고, 1년이 흐른 뒤 하나의 존재감을 지닌 ‘라면알’로 완성되었습니다.
완성된 라면알은 가로 약 45cm, 높이 약 32cm로 혼자 들기조차 버거운 무게를 지니게 되었습니다. 이는 단순한 크기의 확장이 아니라 시간과 반복, 지속이 만들어낸 결과입니다.
제가 좋아하는 말 중에 ‘수적천석(水滴穿石)’이 있습니다. 한 방울의 물이 결국 바위를 뚫듯, 이 작업은 꾸준함이 만들어내는 힘을 시각적으로 보여주고자 했습니다. 폐기되는 가장 보잘것없어 보이는 재료인 라면이 공간을 압도하는 덩어리로 변화하는 과정 속에서, 저 자신의 모습을 투영했습니다.
〈라면알〉은 삶을 향한 저의 도전이자, 살고자 하는 의지의 기록입니다. 이 작품을 통해 관객들 또한 자신의 삶과 노력이 결코 보잘것없지 않다는 메시지를 느끼길 바랍니다.
Q6. 이 작업에서 가장 많은 시간을 차지하는 과정은 무엇인가요?
A. 라면을 삶아 형태를 잡은 뒤 말리고 굳히는 과정이 가장 오래 걸립니다. 작품에 따라 일주일 이상 소요되기도 하고, 그 사이에 비틀어지거나 갈라지기도 해서 중간중간 손을 많이 봐줘야 합니다. 또 썩거나 부식되지 않도록 충분히 말린 뒤, 바니쉬를 여러 번 덧발라 단단하게 코팅하는 시간도 필요합니다.
Q7. 반복적인 제작 과정이 작가님에게 주는 의미는 무엇인가요?
A. 반복은 높은 산을 오르는 과정과 닮아 있습니다.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다 보면 결국 정상에 도달하듯, 반복의 끝에는 새로운 풍경이 펼쳐집니다. 이 과정에는 ‘아무리 어려운 일이라도 꾸준히 하면 결국 해낼 수 있다’는 희망을 담고 있습니다.
Q8. 작업을 하며 ‘노동’에 가깝다고 느낀 순간도 있었나요?
A. 특히 달리는 사람 형상을 라면 한 올 한 올로 표현한 작업이 그랬습니다. 섬세한 힘 조절이 필요해 조금만 실수해도 끊어지거나 붙지 않았고, 그때마다 멘탈이 흔들리기도 했습니다. 목, 어깨, 허리 통증으로 한의원을 다니며 한 달간 작업해 완성했는데, 예술도 결국 체력 싸움이라는 걸 절실히 느꼈습니다.
Q9. 작품에서 말하는 ‘존재의 무게’는 무엇을 뜻하나요?
A. 〈라면알〉은 가벼운 한 줌의 라면에서 시작해, 1년의 시간을 거쳐 들기 힘든 무게를 지닌 존재로 성장했습니다. 처음에는 주목받지 못했던 존재도 인내와 노력을 통해 영향력 있는 존재로 성장할 수 있다는 이야기를 담고 싶었습니다. 라면알의 무게는 곧 인내와 성장의 무게입니다.
Q10. 조형 작업과 회화 작업의 차이는 무엇인가요?
A. 두 작업을 엄격히 구분하지는 않습니다. 표현하고자 하는 내용에 가장 잘 어울리는 방식이 무엇인지 고민한 뒤, 그에 맞는 형식을 선택해 작업하고 있습니다.
Q11. ‘라면 작가’라는 타이틀에 대한 부담은 없었나요?
A. 현재는 라면 작업이 즐겁고, 관객분들도 좋아해 주셔서 ‘라면 작가’라는 타이틀이 마음에 듭니다. 다만 앞으로는 특정 재료에 규정되지 않고, 다양한 소재와 방식으로 폭넓은 예술 세계를 펼쳐보고 싶습니다.
Q12. 이번 전시를 통해 관객에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는 무엇인가요?
A. 무언가를 강하게 전달하기보다는, 전시를 통해 잠시 쉬어갈 수 있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세상이 복잡하게 돌아가는 만큼, 제 전시만큼은 머리를 식히고 ‘라면이 이렇게도 표현될 수 있구나’ 하고 편안하게 즐겨주셔도 충분합니다.
Q13. 앞으로의 작업에서 가장 고민하고 있는 방향은 무엇인가요?
A. 지금까지 해온 것처럼 꾸준히 작업을 이어가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큰 작업을 해보고 싶은 욕심은 있지만, 작업 공간과 시간의 한계가 고민이기도 합니다. 그래도 계속하다 보면 언젠가는 길이 열리지 않을까 기대합니다. 심오한 철학보다는 대중과 즐겁게 소통하고, 위로가 되는 작업을 만들어가는 것이 제 목표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