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오솔길에 흰 자작나무
2026-03-25 임은주 시인
오솔길에 흰 자작나무
오솔길에서 흰 자작나무를 벤다 죽은 할머니가 다녀간
아침엔 모두 제 눈알들을 확인했다
아버지는 동이 트기 전 일어나서 달거리가 없는 딸을 위
해 낫을 갈았다 일곱 자루 중에 네 번째 낫날에 달이 걸리곤
했다 눈은 보기 좋은 것들만 본다고도 했다 그 눈에 보기 싫
은 사람이든 귀신이든 들어오면 잠시 제 눈을 잃어버린다
고 했다 엄마의 눈을 빼내 간 할머니, 내 눈에 할머니만 보
이지 않는 것이 이상했다
백열등 아래 흰 꽃을 달였다 베잠방이에는 그을음과 매
운 불 냄새가 묻었다 그해 아랫배를 쥐어뜯는 첫 신호에 건
드리기만 해도 쏟을 듯한 만월, 큰 집 가는 산기슭 흰 여우
도 입을 헹궜다 했다 달이 차면 차오를수록 자작나무들은
숲 깊은 곳으로 숨었고 좁은 발소리를 따라 오솔길은 구부
러졌다 쉬었다 했다
눈은 너무 보기 싫은 일들을 씻어낸 두 손바닥 속에 숨고
먼 곳까지 가서 소금 우물을 빌려온다 오솔길을 뒤적이며
자작나무를 흔들어 달을 턴다 아버지의 낫질도 흰 숲을 베
어낸 검의 노래들도 모두 흰 점으로 떠나 아득해지는, 보기
싫은 사람의 눈이 된다 했다
나는 할머니의 눈을 종종 빌렸고 보기 싫은 사람을 안 보
이게 눈을 고치는 재주가 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