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한 계단의 간극

2026-01-14     김이경 수필가

또다시 ‘미스트롯’이다. 또 한 번의 대장정을 출발하는 ‘미스트롯 4’를 보며 지난 기억이 떠오른다.

“세상을 꺾고 뒤집어라.”는 구호를 내걸었던 ‘미스트롯 3’이 막을 내렸을 때였다. 처음부터 지켜본 것은 아니어서 그들이 견뎌야 했던 시간을 모두 안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준준결승, 톱10을 가리는 과정부터 보았어도 그 지난함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오디션은 말 그대로 시험이다. 한 문제씩 차례로 풀어내야 하는 긴 여정이다. 그 결과는 천부적인 재능이나 오랜 시간 쌓아온 노력의 총합일 것이다. 그러나 시험이라는 것이 늘 그렇듯, 실력만으로 설명되지 않는 변수도 존재한다. 하필 좋지 못한 그날의 컨디션, 감기 기운, 한순간의 실수 같은 우연들이다. 그런 조건들까지 서로 얽히고 보태져 한 사람을 ‘세상을 꺾고 뒤집는’ 자리에 올려놓는다.

그럼에도 내 시선은 영광의 중심보다 그 주변에 오래 머물렀다. 오디션에는 유난히 극명한 갈림이 생기는 등수가 있다. 10등과 11등, 7등과 8등, 진과 선. 내가 이 프로그램을 보기 시작한 시점이 바로 10등과 11등을 가르는 순간이었다. 이후 7등과 8등이 갈렸다.

10등과 11등의 차이는 마지막 예선 한 번의 기회다. 그러나 7등과 8등은 무대 위에 남느냐 사라지느냐의 차이다. 점수 차가 얼마가 되었든, 그 경계에 서는 순간 삶의 표정은 달라진다. 진과 선의 차이도 여제(女帝)와 입상자를 가르는 선이다.

10등과 11등의 점수 차는 고작 6점이었다. 1등 2,823.18점, 7등 1,787.61점, 8등 1,381점. 우승자와 7등의 간격에 비하면 7등과 8등의 차는 절반도 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 점수의 많고 적음보다 더 중요한 것은, 꺾고 뒤집지 못한 단 하나의 계단이었다.

지금은 한물간 직종이 되었지만, 내가 근무하던 시절 교장과 교감은 제법 선망의 대상이었다. 한때 초등학교 교장은 가장 인기 있는 직업 중 하나이기도 했다. 청소년들이 희망하는 직업으로 교사가 늘 상위에 오르기는 하지만, 관리직에 대한 인식은 많이 달라졌다. 그럼에도 당시의 관리자 승진은 말 그대로 산을 넘고 물을 건너는 길이었다. 연수점수, 연구 실적, 도서·벽지 근무 경력 등등 수많은 점수를 달고 줄을 서야 했다.

한 해 200명의 승진자를 뽑던 당시, 가장 잔인한 경계는 200등과 201등이었다. 내가 교감 연수에 차출되었을 때, 함께 차출된 사람 중에 화제가 되는 사람이 있었다. 소수점 둘째 자리가 모자라 세 번 이나 떨어졌다는 선생님이었다. 백분의 일 숫자의 점수가 모자라 합격과 탈락을 오가는 그 과정을 거쳐야 했던 나는, 가요 오디션 프로그램을 보면서도 내내 그 기억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최종 10인을 선발하는 무대부터 지켜본 나로서는 미안한 마음이 들 만큼, 그들이 감당해야 할 심리적 부담과 ‘한 계단의 간극’을 오히려 더 냉혹하게 느끼며 보았는지도 모른다. 어린 참가자들이 기대 이상으로 선전하는 동안, 오랜 시간 무대를 지켜온 기성 가수들이 탈락할 때는 내 일처럼 가슴이 서늘해졌다. 그러나 우리가 승진할 때 선후배를 고려해 점수를 매기지 않았던 것처럼, 그들 역시 ‘마스터’라는 이름의 심사자들이 매긴 점수 앞에서 자기 몫의 계단에 설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세상을 살다 보면 그 한 계단이 삶의 방향을 비틀어 놓거나 나락으로 떨어뜨리기도 한다. 나는 그 계단 앞에서 뜻하지 않은 사고로 오래 비켜 서 있어야 했다. 먼저 승진 서열에 다가섰지만, 모자란 소수점 두 자리를 채우지 못해 결국 뜻을 접어야 했던 친구는 그 한 계단 앞에서 모든 연락을 끊어버렸다. 그깟 일로 인간관계까지 끊느냐는 말은, 그 계단을 오르내려 보지 않은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말이다. 올라서 보지도, 내려와 보지도 않은 사람은 알 수 없는 환희와 굴욕이 바로 그 한 계단에 있다.

백분의 일의 숫자로 결정되던 가혹한 승진 점수를 떠올리며, 세상을 꺾고 뒤집으며 계단 위에 선 이들에게 나는 조용히 마음의 박수를 보냈다.

이번 대장정의 구호는 “세상을 홀리고 천하를 평정하라”이다. 매번 눈길을 사로잡는 오디션의 구호들. 구호는 점점 커지고 화려해진다. 그러나 무대 뒤는 여전히 줄 세우는 숫자들의 놀이터다. 구호가 무엇이든, 계단은 늘 같은 높이로 놓인다. 한 계단을 오르는 사람은 이름이 불리고, 그 계단을 넘지 못한 사람은 숫자로 남는다.

다시 시작된 경쟁에서 나는 또 11등과 8등을 보게 될 것이다. 진과 선이 같이 흘리는 기쁨의 눈물에서도 다른 색깔을 발견할 것이다. 그리고, 소수점 앞에서 멈춰 섰던 얼굴 하나를 떠올릴 것이다.

세상은 계단 위를 향해 박수를 보내지만, 계단은 여전히 거기 있다. 오르지 못한 사람의 몫으로,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