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현미(아동문학가, 수필가)

1994년 첫 출간 시집 <서른, 잔치는 끝났다>로 일약 베스트셀러 작가의 반열에 오른 최영미 시인. 섬세하면서도 대담한 언어로 자본과 권력을 날카롭게 풍자하는 시를 쓴다는 문단의 평가와 함께, 서울대 학력을 가진 미모의 운동권 출신이라는 배경 또한 대중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그 후로 시집, 소설집, 산문집을 계속 발간하며 꾸준히 활동하였으나 처음만큼 주목받지는 못했다. 알고 보면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지만.

그러던 그녀가 2017년 가을, 한 호텔에 무료투숙을 원한다는 편지를 보낸 일이 일파만파 커지며 논란의 중심에 섰다. 결국 지상파 방송에까지 나와 자신이 처한 상황을 설명하고 사과함으로 대중의 관심과 애정을 얻어내어 단순 해프닝으로 끝났다. 그런데 같은 해 겨울, 문단 내 거물급 시인의 성추행을 언급한 시 ‘괴물’을 발표함으로 또다시 엄청난 소용돌이를 일으켰고, 방송출연도 불사하는 용기로 미투운동을 확산시켰다.

이렇게 자유롭고 솔직하며 뚜렷한 가치관과 자기주장이 강해 보이는 최영미 시인이 올해 초 산문집 <아무도 하지 못한 말>을 발간했다. 그간 매체에 발표했던 글과 페이스북에 올렸던 날것 그대로의 글까지 모아 놓은 책이다. 그래서 처음에는 ‘이런 글도 책으로?’ 하는 낯설음이 들고 계속 읽다보면 ‘생생하네!’ 하는 신선함이 더해진다. 꾸미지 않아도 당당한 저자의 모습처럼 글에서도 화장기를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시로는 못 담은 말, 소설로도 다 못한 이야기를 담는 그릇이 산문이다. … 세상과 넓게 소통하고 크게 부딪쳤던 내 삶의 궤적이 여기에 있다. 저 이렇게 살았어요. … 나의 가장 밑바닥, 뜨거운 분노와 슬픔, 출렁이던 기쁨의 순간들을 기록한 시시하고 소소하나 무언가를 만들어냈던 시대의 일기로 읽히기 바란다.”(작가의 말)

책에는 문단 내 만연하던 성추행을 세련되게 거절하지 못하는 바람에 알게 모르게 왕따가 되어 우수도서에 오르지 못하고 찾아주는 문학지나 출판사가 없어 전전긍긍했던 이야기, 세무서로부터 빈곤층에게 주는 생활보조금 신청대상이라는 통보를 받고서야 자기홍보를 위해 SNS를 시작하고 여기저기 강의청탁을 하게 된 이야기, 월세 만기에 집을 비워달라는 집주인의 문자를 받고는 고민하다 미국 시인 도로시 파커처럼 호텔에서 살다죽고 싶은 로망에 한 호텔에 편지를 보낸 일로 곤혹을 치렀던 이야기, 문단 내 거물시인의 성추행을 고발해 법적소송으로 마음고생 했던 이야기, 직접 일인출판사를 차리게 된 이야기 등이 나온다.

그런데 이야기는 소재별로 묶여있는 것이 아니라 날짜순으로 분산되어 있어 다소 산만하다. 남의 일기를 보듯 흥미로운 현장감은 있지만, 기승전결 정돈된 도서만 접해오던 독자 입장에서 보면 군데군데서 툭툭 튀어나오는 이야기와 두 줄부터 백여섯 줄까지의 자유로운 꼭지 분량, 그때그때 다른 문체 등이 낯설다. 그러나 저자가 무슨 생각을 하고 어떻게 사는지 궁금하거나 쉽게 읽히는 부담 없는 책을 원한다면 꼭 한번 읽어보길 권한다.

“짧고 쉽게 쓰는 일이 사실은 어려운 거야. 짧고 쉽게 쓸 시간이 없어서들 길고 어렵게 쓰는 거지. 좋은 글은 군더더기 없이 꼭 필요한 단어들로만 조합을 이루면 돼.” 의사인 동생 최영주가 진행하는 유튜브 의학채널 ‘비온뒤’에 출연한 최영미 시인이 시에 대해 동생에게 한 말이다. 상황에 따라 다르겠지만, 문단생활을 오래한 고수들이 한결같이 하는 말이기도 하다. 그러니 어렵고 무거운 이야기를 쉽고 가볍게 써버린 최 시인은 고수다.

60세지만 여전히 젊고 급한 성격을 지녔다는데, 말할 때마다 한 번씩 눈동자를 돌리거나 고개를 갸우뚱하며 어눌한 말투로 천천히 신중하게 말하는 최 시인의 이야기를 가만히 듣다보면 가식이나 포장 없이 솔직하고 정직한 생각이 그대로 드러나 신뢰가 간다. 유연한 감성과 자유로운 영혼을 지닌 천상시인이지만 살기 위해 자존심을 내려놓고 몸부림치는 모습에 오히려 자신감, 뚝심, 용기, 강단이 보여 응원하게 된다.

문제를 알면서도 몸 사리느라 나서지 못하는 비겁한 군중들 속에서 결국 더 순수하고 더 책임감 있고 더 용기 있고 더 성격이 급한 사람들이 나서 총대를 메고 아무도 하지 못한 말을 하며 세상을 좀 더 정의로운 방향으로 바꾸어 나간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기회주의적인 삶을 살거나 권력에 비겁하게 아부하는 사람들보다는 약자와 다수의 이익을 위해서 용기 내어 말할 수 있는 최영미 시인 같은 사람들이 더 많아졌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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