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미애(수필가·문학평론가)의 생각정원

스님은 저승꽃이 피었다고 했다. 얼굴에 퍼져있는 검버섯을 저승꽃이라며 무심하게 말씀하시는 스님은 팔순의 연세에 비하면 아직 건강하신 편이다. 17년 전, 시어머님께서 돌아가신 후 화장하여 평소 다니시던 절에 모셨다. 삼우제와 사십구재를 지낸 이후로 명절이면 빠짐없이 절에 들렀으니 스님과 인연을 맺은 지도 꽤 오랜 세월이 흘렀다. 이번 명절에도 차례를 지낸 후 절에 들러 스님을 뵈었다. 점심 공양하고 가라는 스님의 말씀에 간소한 절밥을 맛있게 먹었다. 차를 한 잔 주신다기에 선방에 따라 들어갔다. 스님께서 내게 나이를 물으셨다. 답변을 했는데도 한참동안 말씀이 없다. 더군다나 차를 우려내는 시간이 길어지자 나는 그 사이를 참지 못하고 결국 한마디하고 말았다. “꽤 오래 걸리네요.” 차를 따르던 스님이 가만히 쳐다보며 웃으신다. “서두르지 말고 살아….”

국화꽃 향기가 그윽하다. 그날 돌아오는 길에 스님께서 주신 국화차다. 작은 찻잔 속에 따뜻한 물을 부으니 노오란 꽃봉오리가 봄처럼 활짝 피었다. 코끝에 풍기는 싸한 국화향이 온몸으로 전이된다. 정식으로 다도(茶道)를 배운 적은 없다. 귀동냥으로 전해들은 방법으로 차(茶)를 우려 마실 뿐이다. 한 잔의 차를 마시기 위해 형식을 갖추고 예의를 따른다면 더욱 좋겠지만 잠시 긴장을 풀 수 있고 지친 일상에 활력을 불어넣을 수 있다면 각자 편리한 대로 하면 된다고 생각한다. 사실 다도를 배울 만큼 시간적 여유가 아직은 없다. 하지만 때론 심신이 피곤할 때 혹은 마음을 다스릴 때 마시는 차는 분명 훌륭한 치료약임에 틀림없다.

예전의 나는 커피를 자주 마시는 편이었다. 말을 많이 해야 하는 직업 탓이다. 유난히 많이 마신 날에는 속이 메스꺼워 울렁거릴 때도 있다. 커피를 조금 줄여야지 하지만 결국엔 또다시 커피를 찾고야 만다. 항상 속 쓰려 하는 내게 남편은 신경성일 거라며 마음부터 다스리라고 했다. 성질이 급한 데다 무슨 일이든 속전속결로 해치우려는 욕심 탓에 가만히 앉아 쉴 틈이 없기 때문이다. 사실 속 쓰림이 커피 탓인지 불규칙적인 식습관 탓인지는 확실치 않다. 위장약도 꽤 오랫동안 복용했다. 어쨌든 피곤한 몸과 지칠 대로 지친 빈속에 애꿎은 커피만 자꾸 마시다가 속 쓰림만 더해지는 악순환의 연속이다. 그래서 조금 번거롭기는 하지만 부드럽고 편안한 향의 차를 마시려고 노력 중이다.

차(茶)는 본래 차나무의 어린잎을 따서 만든 것이다. 성분이 차기 때문에 행실이 깨끗하고 덕망이 있는 사람이 마시기에 적합하다고 당나라 현종 때 육우가 지은 『다경(茶經)』에 적혀 있다. 그렇다고 차를 마시는 내가 선하며, 고고하게 덕을 쌓고 산다는 말인가. 내 성격은 지나치게 직선적이며 솔직하다. 그래서 쓰지도 달지도 않은 중간은 싫어한다. 그럼에도 밋밋한 차에 끌리는 것은 무슨 연유에서일까. 『다경(茶經)』에서 다도는 중용검덕(中庸儉德)이라 했다. 중용이란 ‘어느 쪽으로 치우치거나 모자람이 없이 알맞은 일’이며, 검덕이란 ‘검소한 마음가짐’이란 의미다. 그래서 간혹 일상사에 번민하거나 두통에 시달릴 때 마시는 차 한 잔은 탁월한 효과가 있나 보다.

처음 차를 마시기 시작할 때에는 커피잔을 이용했다. 차를 담는 그릇이 어떤들 무슨 상관일까 싶었다. 그러다 지인들과 강화도 산사에 갈 기회가 있었는데 산 중턱에 있는 찻집에 인연이 되었다. 그곳에 진열된 다기들이 나를 사로잡은 것이다. 창문 너머로 불어오는 봄바람 탓이었는지, 그 바람에 흔들리던 풍경(風磬) 때문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흙벽의 거친 질감과 담백한 다기의 색감이 묘하게 어울렸다. 집요하게도 흑백의 무채색을 좋아하는 내가 부지불식간에 풀빛을 닮은 중간 색감에 빠진 것이다. 그 찻잔 속에서야말로 차는 제 색깔과 제 향내를 마음껏 보여주고 있었다.

그런데 막상 다기를 장만하려 하니 생각보다 종류가 많았다. 우선 찻물을 끓이는 데 쓰는 찻주전자와 잎차를 우려내는 다관이 있다. 다관은 위에서 잡는 주전자형 손잡이를 말하는데 나는 옆에서 잡을 수 있는 자루형 손잡이인 다병을 구입했다. 특히 자루형 손잡이는 남자의 성기 모양에서 따왔다고 하길래 의미심장한 눈길로 바라보기도 했다. 그리고 끓인 물을 식히는 숙우라는 그릇도 있다. 끓인 물을 숙우에 담아 적당히 식으면 찻잎을 담은 다관에 붓고 차를 우려내는 것이다. 그 외에도 잎을 거를 수 있는 거름망과 물 버림 사발인 퇴수기, 찻상에 까는 삼베나 무명천으로 만든 차포까지 준비하면 기본은 갖춘 셈이다. 그렇다고 해서 다도의 경지에 오른 것은 아니다. 그저 밤늦도록 공부하는 큰아이에게는 머리가 맑아지는 국화차를, 작은아이와 남편은 대나무 잎과 메밀을 섞은 메밀차를 그리고 나는 작설차를 가끔 마실 뿐이다.

요즘 우리들 삶을 지배하고 있는 것은 속도전이다. 그래서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직선의 세계’이다. 도로도 직선이고 집도 직선이며 심지어는 생각도 직선이다. 직선은 우회하고 돌아가야만 하는 곡선의 비효율성을 최소화하는 것이다. 결국 우리는 그 효율성의 계산 덕에 직선의 길을 선택할 수밖에 없다. 어렸을 적에 나는 유난히 잘 넘어졌다. 성질이 급한 탓인지 서두를 일이 아닌데도 천천히 걷는 법이 없었다. 그러다 보니 돌부리에 채이거나 문지방에 걸려 넘어지는 횟수가 많았다. 스님께서 내게 차를 선물한 이유를 안다. 안단테, 안단테. 이제는 조금 천천히 살아가라는 마음이실 게다. 바쁘게 살고 있는 지금 그래서 뛰어갈 수밖에 없는 내게, 스님은 여유와 느림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신 모양이다.

물이 끓는다. 천천히 물이 식기를 기다려 찻잎을 넣고 차를 우려낸다. 찻잔에 차를 따라 향기를 음미하며 지그시 눈을 감아본다. 세상은 조용하기만 하다.

저작권자 © 반월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