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성 수필가·시인

‘南으로 窓을 내겠다’는 시인은 “새 노래는 공으로 들으랴오” 한다. 새 노래를 듣는 값으로 씨 뿌리고 김매고 하여 밭에서 옥수수가 익거들랑 와서 함께 자셔도 좋다고 한다. 나도 걷는 것을 공으로 걷지 않으려 한다. 73년 동안 땅을 디뎌온 두 발을 최대한 빠른 속도로 움직여 ‘걷는 건 공으로 걸으랴오’ 한다. 일은 7시 시작이다. 핸드폰을 열어 6시가 되기를 기다린다. 1분이란 시간도 어지간히 길다. 6시. 즉각 일어나 신발 신고 엘리베이터 타고 1층으로 내려가 현관을 나선다. 자, 여기서부터다. 옛날 10리나 20리 걸어서 통학할 때, 그냥 걷기만 하면 ‘걷는 걸 공으로 걷겠다’는 태도다. 영어 단어를 외우든지, 아니면 1392, 이성계가 조선을 세운 해, 1592, 임진왜란이 일어난 해. 연대를 외우든지. 나는 중얼거리기 시작한다. “道可道 非常道 名可名 非常名 무명천지지시 유명만물지모……” 횡단보도를 네 개 지나 소방서를 지나면 곧 시청 정문이다. 시계를 보니 15분이 지났다. 이때는 “希言自然 故飄風不終朝 驟雨不終日 孰爲此者天地 천지상불능구 이황어인호”에 이른다. 경찰서를 지나 작은 골목길을 건너 세무서 4거리에 이르면 “以道佐人主者 不以兵强天下 師之所處 荊棘生焉 대군지후 필유흉년”이 된다. 전체 81장 중에 30장이다. 앞으로 남은 51장, 내 생명 안에 다 외울 수 있을까? 실은 20년쯤 전에 81장 끝까지 5000여 자를 다 외웠던 것인데, 돌보지 않았더니 5000이 0이 되었다. 놀면 뭐하냐 싶어 5천을 다시 각인하기로 했다. 거칠게 삽질하지 않고 입김 솔솔 불어야 화석이 드러나는 것처럼, 우격다짐으로 집어넣으려고 하면 신경질만 나고 안 된다. 그런데 외워서 뭐하느냐고? 다 외고 난 다음 대답을 생각해보자.

예술의 전당을 지나 횡단보도를 또 하나 건너고 힘껏 걸어 단원구청 건너편 버스 정류소에 도착해 핸드폰을 열어보니 6시 33분. 어제보다 1분을 단축했다. 의자에 앉아 구청 옆의 해바라기밭도 구경하고 몇 번 버스가 몇 분만에 한 대씩 지나가나 살펴보기도 하고 그러다 6시 59분. 작업 시작을 핸드폰으로 신호를 보내 알리고 집게와 수집 봉투를 들고 일어선다.

물에 들어가 보아야 발밑이 자갈밭인지 진흙밭인지, 머리카락을 헤쳐 보아야 머릿니가 얼마나 서식하고 서캐는 얼마나 붙어 있는지 알게 된다. 집게 들고 봉투 들고 직접 떨어진 것들을 주우려고 보니, 숲이 우거진 공원으로만 생각했던 곳의 다른 모습이 나타난다. 버리지 않는 사람이 더 많아 이 정도일 수도 있겠지만, 또 반대로 말한다면 사람들이 주저없이 버린다. 종이컵, 플라스틱 컵, 맥주나 음료수 캔, 하긴 버리지 않고 어쩔 것인가? 10m 간격으로 遺棄物 수집 통이 배치되어 있는 것도 아니니. 풀숲에 은박지에 싸 구운 감자가 버려져 있다. 뒤적거려 보니 감자 아래에 개미들이 달팍거린다. 대여섯 개 은박지를 죄다 벗겨 담고 감자는 담지 않았다. 달팍거리는 개미 떼가 물어간다면 이건 코끼리가 눈 똥을 쇠똥구리가 뭉쳐 굴려가는 것과 같은 일 아닌가. 폐기물의 재활용에도 부합하는 일이라고 본다. 그런데 이건 뭐야? 콘돔. 여기 하나, 또 하나, 셋, 넷. 넓은 주차장에 차를 세워놓고 어떤 남녀가 차 안에서 性交를 한 증거다. 이건 내용물의 신선도로 보아 오늘 새벽쯤의 결과물로 보인다. 까치나 비둘기, 고양이 외에 공원의 생태 활용도가 광범위하다 하겠다.

탑 앞에 섰다. 높이 솟은 탑신에 ‘護國國家有功者功績碑’라고 새겨져 있다. 내 눈에는 하찮은 것만 들어온다고 했지. ‘호국국가유공자’라고? ‘建國有功者’라고 하지 ‘건국국가유공자’라고 하나? ‘建國記念日’이라고 하지 ‘건국국가기념일’이라고 하나? ‘護國佛敎’라고 하지 ‘호국국가불교’라고 하나? 탑면 왼쪽에 시 한 편이 새겨져 있다. 2행째에 “風前燈火에 처한 祖國을 求하고” 했는데, 기억을 더듬고 사전을 찾아보아도 ‘求’보다는 ‘救’가 맞는 것 같은데.

공원에서 줍는 다른 팀을 만났다. “아, 형님들 안녕하십니까?” 인사했다. 이럭저럭 소통이 되어 격 없이 말이 오가게 되었다. 내게 묻는다. “사장님은 몇이시오?” “예, 73입니다.” “ 나는 76이고 저 사람들은 모두 여든이 넘었어요. 우리 대장은 90이 넘었고요.” 나는 나부죽이 땅에 엎드렸다. “죄송합니다. 언제나 형님이라고 부르겠습니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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