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미애(수필가·문학평론가)의 생각정원

결혼 후 여섯 해를 보낸 어느 날 저녁이었다. 그날은 유난히 친정어머니 생각이 그림자처럼 무겁게 드리우고 있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리 먼 곳에 살지 않아 가끔 찾아가 보기도 했었는데 아버지 고향인 충남의 작은 시골마을로 내려간 다음부터는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 더 해졌다. 허름한 대문 밖 그곳에서 나직이 어머니를 불러보고 싶었다.

스물네 살이 되던 해 나는 결혼했다. 결혼하기 전까지 한 번도 부모의 슬하를 떠나 본 일이 없다. 그 때문에 결혼하고 몇 년은 줄곧 동생들과 어머니 생각을 마음에서 떼어 놓을 수가 없었다. 어떤 때는 길가의 행상하는 아주머니만 봐도 친정어머니 생각에 눈시울 적시기 일쑤였다. 그러던 어느 날 퇴근길에 친정 동네에서 함께 지냈던 친구를 우연히 만나 밀린 이야기를 한참 하고 돌아왔다. 그래서인지 어머니가 더욱 그리워졌던 모양이다. 저녁밥을 먹는 둥 마는 둥 편치 않은 심사에, 늦도록 장사하고 돌아오셨을 어머니의 초라한 모습을 그려보다가 까무룩 잠이 들었다.

한없이 넓고 거친 들에 나 혼자 서 있었다. 대지의 표면이 끝에서 끝까지 보일 정도로 멀리 바라보이는 황무지 한 가운데인 듯싶었다. 굳이 그 느낌을 적어보라고 한다면 무한대지라고 해야 할까. 가없이 넓은 들판이었다. 무한히 먼 저쪽에서 내 앞까지, 또 내 앞에서 반대 방향으로 길은 끝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그렇다고 차가 다닌 흔적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다닐만한 곳도 아니었다. 이 길의 끝은 도대체 어디일까. 생각에 잠겨 먼 길 끝을 바라보는데 희미한 작은 점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움직이고 있었다. 점은 점점 커지기 시작하더니 한참 후에는 사람의 모 습을 갖추기 시작했다. 그것은 중년의 아주머니 모습이었다.

아주머니는 크고 무거운 짐을 머리에 이고 있었다. 두 손에는 너무 무거워 땅에 질질 끌릴 정도의 보따리까지 들었다. 작은 짐 하나라도 거들어줘야 하는 것 아닌가 싶어 아주머니에게로 다가섰다. 그러는 사이 아주머니의 그림자는 나와 더욱더 가까워졌다.

어떤 고달픈 사람일까, 누굴 찾아 나서는 길일까…. 자세히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그러다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 아주머니는 바로 내 어머니였다. 나는 마구 소리를 질러댔다.

“어머니 웬일이세요. 이 먼 길을 어쩌자고 떠나신 거예요? 그것도 혼자서요. 대체 머리에 얹은 짐은 어디로 가져가는 길이세요. 무거우니 제발 좀 내려놓으세요! 어서요!”

울고 싶은 심정으로 매달렸다. 그러나 어머니는 너무 무거운 짐을 이고 계셨는지 얼굴조차 돌리지 못했다. 처음엔 내가 누구인지 알아채지도 못한 채 갈 길이 바쁘다는 듯이, 또 어떻게 보면 짐이 너무 무거워 잠시라도 머무를 수 없다는 듯이 길을 재촉했다. 아무리 큰 소리로 어머니를 부르며 잡으려 해도 어머니는 막무가내로 내 손을 뿌리쳤다. 도대체 어디로 가려고 그 엄청난 짐을 이고 나섰냐고 물어도 어머니는 엷은 미소만 지을 뿐 아무 대답이 없다.

순간 어머니가 저만치로 멀어져 갔다. 나는 어머니를 향해 소리치기 시작했다. 잡아야 할 것 같았다. 이대로 놓치면 영영 잡을 수 없을 것 같아 조바심쳤다. 하지만 어머니를 부르던 내 목소리는 소리 없는 메아리처럼 속으로만 잦아들고 어머니를 따라가려던 내 발걸음은 천근만근 의 무게로 단 한 발자국조차 뗄 수 없었다. 울며불며 소리치다 쳐다보니 어느새 어머니는 다시 하나의 점으로 변해 있었다.

“어머니!”

꿈이었다. 꿈을 깬 후에도 나는 한참 동안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아직도 어머니의 모습이 사라지지 않은 것 같은데… 하지만 확실히 꿈은 꿈이었다. 등골에 축축이 땀을 느꼈다. 다시 잠이 들 때까지 오랫동안 어머니 생각이 났다.

30년이란 시간이 흘렀음에도 아직 꿈이 생생하다. 어쩌면 어머니의 일생이란 꼭 그 꿈과 같은 것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몇 번은 자살도 계획해 보시고 어떤 때는 사는 것이 죽는 것보다도 싫다고 말씀하시더니, 별 서러운 기별도 없이 훌쩍 쉰셋에 세상을 떠나셨다. 가만히 생각해 보았다. 도대체 어머니 머리와 손에 들려있던 그 무거운 짐들은 무엇이었을까. 혹여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어머니가 지고 가야 할 삶의 무거운 짐들은 아니었는지. 그래서 무거울 테니 내게 맡기라도 손 내밀어도 뒤돌아보지 않고 가셨던 것인가. 그렇다면 그 무거운 짐을 풀어 쉬게 해 줄 사람은 과연 누구였을까. 이런저런 생각에 잠긴 채 나는 다시 잠이 들었다.

삼십 년 전 그날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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