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의 크리스마스>

수필가 심명옥

 

22년이라는 세월이 무색하다. 1998년에 개봉한 영화가 세월의 흐름 속에서도 그 가치가 반짝이고, 오히려 더 깊은 맛을 낸다는 건 축복이다. 기억 속에 소중하게 자리잡고 있어 차마 다시 열어 볼 엄두를 못 냈던 허진호 감독의 <8월의 크리스마스>가 여전한 울림으로 와서 좋다. 

처음부터 영화는 대놓고 죽음을 이야기한다. 반쯤 열린 문틈 사이로 나른한 여름 햇살이 들어오는데, 정원은 낮잠에 빠져 있다. 낮잠을 깨우는 건 인근 초등학교에서 들려오는 구령소리. 잠에서 깬 정원은 병원으로 향하고, 그 뒤 텅 빈 운동장에서 죽음에 대해 생각해 왔다고 독백한다. 죽음에 관한 영화라고 귀띔한다는 것은 정원이 반드시 죽는다는 소리이기도 하다.  

예고가 있어도 일상은 흐른다. 정원이 시끄러운 장례식장에서 느끼는 혼란이 있을 뿐, 나머지 삶은 연꽃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 조용하다. 삶의 뒷면이 그대로 죽음인 듯, 초조해하거나 목소리를 높이지 않고 일상을 이어간다. 떠날 정원과 보낼 가족들은 속울음을 삼키면서도 서로에게 감정을 들키지 않으려 한다. 여느 때처럼 사진관을 열고 밥을 해 먹고 설거지를 한다. 사랑하는 사람들과 나누는 남아 있는 일상이 더없이 귀하다는 듯이. 아프다. 껴안고 울지 않는다고 해서 모를 리 없다. 감독은 절제를 통해 슬픔을 극대화한다. 리모컨 작동법을 못 알아듣는 아버지에게 짜증내는 정원이나, 천둥 치는 밤 자기 곁에 잠든 정원을 모른 척하는 아버지는 다 아프다. 특히, 생선 잡는 걸 무심히 내려다보는 아버지와 수족관 안에 살아 있는 물고기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정원의 모습이 교차되는 장면이 아리다. 서로를 생각하면서도 다른 길을 갈 수밖에 없는 삶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다가오는 죽음 앞에서 정원은 삶을 하나씩 정리해 나간다. 가족들과 사진을 찍고, 친구들과 좋은 시간을 보내고 기념사진을 찍는다. 사랑을 잡아두려는 서로 간의 암묵적인 합의에 의한 행동들은 더없이 차분하다. 자기가 없을 경우를 대비해, 사진관 기계 작동법을 사진을 붙여가며 정리해 두는 모습은 담담하기까지 하다. 

다림을 정리하는 것도 쉬웠을까. 생의 끄트머리에 장난처럼 찾아온 사랑. 주차단속 요원 다림은 사진 인화를 위해 사진관으로 찾아오다 점차 정원의 순수함과 따뜻함에 마음이 간다. 급하다고 보채고, 쉬어 간다고 들리고, 8월생 사자자리와 자기가 잘 맞는다고 은근 떠보기도 하고. 시도 때도 없이 와서 편하게 말하는 다림을 보며 정원도 자꾸 웃는다. 스며들 듯 다가서는 두 사람. 제대로 된 데이트는 놀이공원에서 딱 한 번이었지만, 소소한 일상들은 사랑을 보여 준다. 상대방이 젖지 않게 하려고 우산을 기울여 주고, 무거운 것을 들어 주고, 시시콜콜한 이야기에 웃어 주고. 사랑이 뭐 별건가. 정원과 다림에게 크리스마스는 좀 이르게 찾아왔을 뿐이다. 

갑작스레 찾아온 이별, 그것도 다림에게는 설명되지 않은 이별이 안타깝다. 설레는 맘으로 편지를 써서 넣었지만 끝내 열리지 않는 문, 다시 편지를 꺼내려고 하다 오히려 더 안으로 들어가는 편지는 점점 깊어지는 다림의 마음을 닮아 있다. 초원사진관 앞에서 서성이던 다림이 돌을 던져 유리창을 깨는 것은 사랑의 다른 이름이다. 생에 집착을 보이지 않던 정원이 병원에서 어떻게든 살아볼 의지를 보인 것도 다림 때문이다.  

이별 후 다림에게 전해졌을 것으로 추측되는 정원의 답장. 그 속에는 사랑을 안고 가게 해 줘서 고맙다는 정원의 고백이 들어 있다. 사진관에 걸린 자신의 사진을 내려다보며 다림이 웃는 이유는 사랑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함께할 수는 없지만 자신 또한 정원을 사랑으로 기억할 수 있을 테니, 따뜻할 게다. 

예전보다 영화를 가볍게 받아든다. 죽음과 사랑을 담았지만 영화는 더없이 담담하고 따뜻하다. 죽음은 삶의 끝도, 사랑의 끝도 아니다. 간직하고 있는 사람 마음속에 언제나 살아 있는 것이다. 환하게 웃고 있는 김광석의 영정 사진을 보고 죽음에 대한 담론을 하고 싶었다던 허 감독의 의도는 제대로 전달된 듯하다. 내내 나와 함께할 <8월의 크리스마스>, 20년 후에 꺼내 봐도 여전히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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