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봐도 독특한 그림이다. 배경은 순수한 여백인 채로, 얼굴만을 화폭에 덩그렇게 그린 자화상이다. 이런 특이한 그림에는 무슨 사연이 있는 걸까?
백동거울을 바라보며 그린 윤두서(1668-1715)의 자화상은, 국내 회화사상 가장 뛰어난 작품 중 하나로 여겨진다. 우리나라 초상화 계통의 그림 중 유일하게 국보로 지정되어 있기도 하다.
초상화들은 대개 그 시점이 측면인데 반하여, 윤두서의 자화상은 당당히 정면을 응시하며 맞서는 느낌을 준다. 화폭의 윗부분에 배치한 얼굴에는 아주 대담한 표현 기법들이 사용되었다. 탕건을 그려냈으되 상단부를 과감히 생략했고, 끝이 매섭게 치켜진 눈썹, 관람자의 마음을 관통하는듯한 눈빛, 풍만한 얼굴과 꽉 다문 두툼한 입술, 한 올 한 올 생생하게 그려낸 사자 갈기 같은 수염 등의 요소로 화면을 구성하여, 압도적인 존재감이 표출되는 그림을 완성했다. 이렇게 그려진 자화상에서 윤두서의 용모는 물론이거니와 내면의 기개까지도 읽을 수 있다.
암울한 현실과 높은 이상과의 괴리감에서 비롯되는 내면적 갈등, 그러나 좌절하지 않고 자신의 길을 꿋꿋이 걸어가고자 한 의지를 그림 속에 담았다. 미완성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강렬한 인상을 남길 수 있는 것은 고독하되 당당했던 자신의 마음과 감정을 생동감 넘치게 묘사해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일까? 자화상에서는 근현대 미술의 분위기마저 느껴진다.
여담이지만 자화상을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정밀히 조사한 결과가 매우 흥미롭다. 실제로는 반신을 담아낸 그림이었을 것이라 한다. 귀는 붉은 선으로 그려냈고, 목과 상체의 윤곽을 드러냈으며, 도포의 형상도 담아낸 흔적들이 있다고 한다.
윤두서는 시조 문학의 대가 윤선도의 증손자이고, 실학을 집대성한 정약용의 증조 외할아버지이다. 그야말로 명문가의 종손으로, 요즈음 흔히 이야기하는 금수저인 셈이다. 그러나 어지럽게 당쟁이 벌어지며 정치적 입지가 불안정했던 윤두서는, 관직 대신 학문과 예술을 벗 삼게 된다. 30대에 이미 머리가 하얗게 세어버렸다는 이야기에서 알 수 있듯이, 굴곡 가득했던 인생에서 맛본 시련과 울분, 흔들리는 자신을 다그치던 엄격함과 다짐까지 화폭에 토해냈다. 이 모든 것이 집약된 강렬한 얼굴을 그려내며, 그리고 그 얼굴과 끊임없이 눈을 마주치며, 자신을 ‘치열하게’ ‘관조’하게 되는 모순이 조화를 이루는 예술적인 시공간에 놓여있었으리라.
윤두서의 친구 이하곤의 찬시를 읽어본다. ‘6척도 안 되는 몸으로 세상을 초월하려는 뜻을 품었네. 긴 수염 나부끼는 얼굴이 붉구나. 그를 바라보는 이들은 도사일까 검객일까 고심하겠지만, 저 겸양하는 기품은 독실한 군자로서 한 점의 부끄러움이 없구나.’
난 여행을 준비한다. 해남 녹우당에 갈 요량으로. 그와 눈 맞춤을 하며, 등을 따뜻하게 다독이고 싶은 마음을 전하려 한다. 외롭고 힘들었을 그에게. 이제는 마음을 푸세요.

안산환경미술협회 이사
저작권자 © 반월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