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산환경미술협회 서영숙 회장

인간은 빵으로 살고, 재능으로 죽는 거라며 화를 낸 사람은 세잔의 아버지였다. 세잔의 아버지가 얼마나 완강하고 무서웠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자수성가형의 강한 아버지는 배고픈 화가가 되고자 하는 아들을 받아들이기 힘들었을 것이다. 재능으로 죽어도 미련 없이 죽을 수 있는 일의 행복을 인정해주는 가족은 그다지 많지 않다.

세잔(Paul Cézanne 1839-1906 프랑스)이 가족의 환영을 받지도 못하면서 가슴 속에 묻어버리지도 못하고 꺼내 키워야 했던 그림의 불씨가 어떤 것이었는지는 말년에 생 빅투아르 산을 그린 그림을 보면 선명해진다. 세잔이 그린 수많은 시리즈 중 하나인 생 빅투아르 산.

생 빅투아르 산은 프로방스의 고대 로마인들이 그들을 침략한 군대에 맞서 얻은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성스러운 승리의 산’이라고 이름 붙여졌다. 세잔이 생 빅투아르 산을 대상으로 그린 그림은 60점 이상인데, 각각의 작품 중에 하나도 같아 보이는 작품은 없다. 그의 그림 속의 생 빅투아르 산은 명확한 원뿔 모양이 아니라, 평평하게 펼쳐진 대지 위에 솟은, 불규칙한 삼각형의 형상을 띄고 있다. 또한, 산이 여러 측면 안에 흡수되는 반면, 산 앞에 놓인 대지는 충분히 그 질감을 표현해줌으로써 산과 그 주변의 자연 간의 조화를 만들어내고 있다. 이렇듯 세잔은 생 빅투아르 산을 배경으로 한 여러 작품을 통해 색채의 변주를 실험했다.

이 작품뿐 아니라 생 빅투아르 산을 소재로 한 다른 작품들에서도 세잔은 풍경의 디테일을 정확하게 재현하는 데 관심을 두지 않았다. 대신 그는 조화를 이루는 색채의 조각들을 통해 거대한 ‘자연의 모자이크’를 완성하고 싶어 했다. 아무도 세잔이 왜 그토록 생 빅투아르 산에 집중했는지 알지 못한다. 혹자는 그 이유를 다른 예술가들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했던 세잔 자신의 모습과 닮았기 때문이 아닐까 추측하기도 한다. 분명한 건, 생 빅투아르 산이 세잔이 평생 애정을 품었던 그의 고향, 프로방스의 모습을 가장 잘 보여 주는 자연의 일부였다는 사실이다.

폴 세잔은 1839년 남프랑스의 엑상프로방스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평생 그림을 그리다 1906년 죽어 그곳 묘지에 묻혀있다.

사망하기 며칠 전 추종자인 에밀 베르나르에게 쓴 마지막 편지에서 그는 자신의 자연에 대한 애정 어린 탐구를 다시 한번 고백한다. “나는 자연에 대한 탐구를 계속해왔습니다. 나는 자연을 탐구함으로써 보고 느낀 것을 화면에 논리적으로 부연시키고자 평생 노력했을 따름입니다”. 그래서 세잔은 엑상프로방스 자연의 가장 뛰어난 절경인 생 빅트아르산을 즐겨 그렸다. 그는 자연의 기본 구조를 구와 원추 및 원기둥으로 파악하는 시선을 획득한 것이다. 자연을 그린 시각에서 해체 시킨 세잔은 풍경화에서 깊이를 제거한 대신에 색채로 분할된 면과 종합하여 재조합시킨 화면을 창조해 냈다. 그런 미학 원리에 한치 타협 없는 외곬으로 일관했던 까닭에 인물화에서조차 우리는 엑상프로방스의 자연을 느낄 수 있다.

언젠가는 나도 시간을 내어 프랑스 남부 엑상프로방스에 가서 거리, 나무, 상점, 사람, 공원, 산, 묘지, 등 세잔의 발자취를 느껴 보고 그가 이젤을 메고 생 빅트와르산을 스케치하러 다녔던 길, 세잔의 루트를 걷고 싶다.

그리고 나를 돌아보고 싶다. 내가 지금 가고 있는 이 길은 무엇인지? 나의 길을 잘 걷고 있는지? 진정한 나의 길은 무엇인지? 생 빅트아르산을 보며 나 자신을 찾아가는 여행을 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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