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파다. 몇몇 장면은 심하다 싶을 정도로 뻔하기까지 하다. 음악은 너무 솔직해 은유의 맛이 없다. 뭘 숨기고 말 것도 없이 날것의 감성 그대로 다가가면 된다. 그럼에도 영화는 자꾸 뒷덜미를 잡아챈다. 어쩌면 영화 속 감성을 이해하는 마지막 세대가 될지도 모르겠다는 조바심이 발길을 잡아끈다는 생각이 든다. 감성 연기의 끝판왕 수애와 이병헌의 힘으로 담아낸 ‘그해 여름’(감독 조근식)은 장맛비에 젖은 숲의 내음처럼 짙고 깊은 향을 낸다.

건강이 안 좋아서 학교를 그만 두는 윤석영 교수에게 텔레비전 프로그램 구성작가가 찾아온다. 매번 녹화 때마다 시간에 모자르게 대본을 쓴 이수진이 얼결에 윤석영을 섭외해야 하는 입장에 처한 것이다. 평생 독신으로 살아온 윤석영에게 꼭 한 번 만나보고 싶은 사람을 찾아준다는 프로그램은 좋은 미끼였다. 죽음을 앞둔 그는 어떻게든 서정인을 만나고 싶었을 텐데, 때마침 찾아온 이수진은 어쩐지 그리운 사람의 모습을 닮아 있다.

피식, 서정인처럼 노래를 못 부르는 이수진에게 마음이 열린 윤석영은 단숨에 1969년의 뜨거운 여름 속으로 달려간다. 청년 석영은 부잣집 도련님이다. 대학엔 입학했지만 친구 따라 강남 간다고 뜻도 없으면서 데모에 가담한다. 그에게 데모는 그냥 심심풀이였던 것이다. 다른 선배나 친구들과는 달리 농활도 그저 잔소리꾼 아버지를 피해 간 것뿐이다. 모기가 문다며 서울로 가자고 투정부리는 석영은 딱 어린아이같이 천진난만하다. 이런 그에게 서정인이 스며들 듯 눈에 들어온다. 노래도 못하고 약지 못하지만 슬픔을 꾹꾹 눌러 참으며 마을을 지키고 있는 도서관 사서 정인이 특별해진다.

둘이 서로에게 마음을 열어가는 모습은 황순원의 <소나기>에 나오는 소년소녀처럼 맑고 깨끗하다. 느닷없이 내리는 비처럼 강렬한 끌림이지만 달빛이 강에 비추듯 표현은 은은하다. 전파사 앞에서 음악을 듣는 정인을 바라보던 석영, 버스를 놓치고 밤길을 걸어 집으로 돌아오는 두 사람의 모습은 그대로 한 편의 서정시다. 그러면서도 설핏 스치는 슬픈 기운. 정인이 들려준 만어사 이야기나 측백나무 잎 이야기는 두 사람의 앞날을 보여주는 것 같다. 용왕의 아들이 부처가 되어 하늘로 가자, 따라나섰던 물고기들이 그대로 돌이 되었다고 한다. 안부를 실어 보내는 편백나무 잎에는 사람을 부르는 힘이 있단다.

예견된 파국은 둘의 감정이 절정에 달할 때 찾아온다. 영복이 아버지 말대로 결국 시대가 그렇다. 1969년은 루이 암스트롱이 달에 간 해이기도 하지만, 분단국가 우리나라에서는 이념의 서릿발이 한창 내리던 시절이다. 전쟁의 상흔이 가라앉지 않아 반공의식이 투철했고, 연좌제가 있어, 월북자가 있던 수내리 마을 사람들은 알게 모르게 피해를 보고 있었다. 월북자 서민혁의 딸인 정인이 아무리 착해도 마을 사람들은 마음의 거리를 둘 수밖에 없었다. 자기를 위해 아들 소식을 숨긴 정인이의 뺨을 때린 영복이 아버지의 이중적인 태도는 다만 그만의 것이 아니다. 하물며 휴학계를 내러 갔다가 본의 아니게 3선 개헌 결사반대 데모대에 휩쓸려 잡힌 석영이가 정인과 아는 처지라고 말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정인이를 부정하라는 아버지의 부탁을 겁 많은 청년 석영은 무시하지 못한다. 취조실의 그 살벌한 분위기 속에서 사랑을 거부할 수밖에 없는 석영과 정인의 아픈 눈빛에 오래도록 찔린다.

‘사람을 사랑하는 일은 쓸쓸하다.’는 말처럼 두 사람은 평생 서로를 그리워한다. 석영의 앞날을 위해 연기처럼 사라진 정인, 정인을 찾기 위해 전국을 뒤진 석영. 편안한 세상에서 만났으면 날개를 달았을 두 사람의 사랑은, 그리움으로 채색되어 사람을 흔든다. 소중한 것은 눈이 아닌 마음에 있다는 듯, 떨어져 있어도 사랑을 믿고 씩씩하게 살다 간 정인. “이제 우리 어디로 가요.” 초점 잃은 정인이의 눈빛을 거둬들인다. 행복하게 살다 갔으니 걱정하지 않기로 한다.

비가 주룩주룩 내렸으면 좋겠다. 강의가 끝난 후 갑작스레 내린 비로 당황하고 있을 때, 방향이 다른데도 버스 정류장까지 우산을 받쳐주던 그 애가 갑자기 생각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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