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 신문에 실린 그림 한 점에 온전히 마음을 빼앗겼다. 동네마다 쉽게 찾아볼 수 있었던 구멍가게. 그 가게만 그리는 작가가 연재를 시작한 듯싶었다. 이런 그림 앞에 글은 군더더기일 뿐. 나는 그가 내놓는 가게로 살랑살랑 걸어가 미닫이문을 열곤 했다.

신간 알림 소식을 통해 들은 《구멍가게, 오늘도 문 열었습니다》(이미경 그림과 글, 남해의봄날). 신문에서 봤던 그림이 책으로 묶여 나왔다는 것도 반가운데 심지어 먼저 나온 《동전 하나로도 행복했던 구멍가게의 날들》이 있었다.

거의 동시에 받아든 두 권의 책. 뭉클했다. 단순히 가게의 모습만 담았을 뿐인데 숨소리가 들렸다. 사람과 가축의 숨. 나무와 바람, 밤과 낮의 숨. 덩달아 내 숨도 편안해지는 걸 느낀다.

그가 구멍가게만 찾는 이유는 뭘까. 낡고 소소해서 볼품없어 보이는 가게가 지닌 은근한 아름다움이 좋아서, 그 가게가 우리 곁에서 완전히 사라지기 전에 기록할 수 있기를 바랐다. 수십 년을 한자리에서 뚝심 있게 살아온 주인의 삶을 우리에게 들려주려고 했다.

그래서 고만고만한 크기의 가게지만 담고 있는 이야기는 다 다르다. 남편이 어릴 적 학교를 마치면 자주 들렀던 구멍가게를 인수해서 꾸려 간다는 차부슈퍼. 근현대사 기록사진에서 툭 튀어나온 것 같은 당리가게.

대산마을에서 간판도 없는 점방을 지키고 있는 할머니. 가게 옆으로 난 문을 열고 무쇠솥이 걸려 있는 아궁이 부엌을 가리키며 말문을 연다. “이 좁은 부엌에서 남편과 네 아들 도시락이며 일하는 사람들 밥을 다 해먹였는데 힘들었어도 그때가 사람 사는 것 같았지.”

사람 사는 것 같은 삶. 그러고 보니 가게와 그 가게를 품은 풍경은 다르나 같은 게 눈에 띄었다. 어느 가게나 평상 혹은 몇 개의 의자가 있었다. 지금은 덩그러니 자리를 지키고 있지만 사람 사는 냄새는 거기에서 만들어졌다.

학교에선 늘 불량식품을 먹으면 배탈이 난다고 했지만 한 번도 배 아파 본 적이 없다. 뻔질나게 구멍가게를 드나들면서도 유통기간이라는 걸 챙겨 읽은 적도 없고. 나는 친구들과 우르르 몰려가 주인 아저씨나 아줌마의 혼을 쏙 빼놓곤 평상에 앉아 알사탕을 오도독 깨물어 먹거나 하드에 혀가 시뻘겋게 물든 친구를 보며 허리가 꼬부라지도록 웃었다.

저녁거리로 어묵을 사서 집으로 가다가 야금야금 한두 장을 먹어치우곤 엄마가 눈치챌까봐 마음 졸이기도 했고 밤늦은 시간에 담배를 찾는 아버지 심부름으로 닫힌 가게의 문을 두드리곤 했다. 지금은 가게와 집이 따로 있지만 그때는 주인이 가게 뒷집에 사는 일이 흔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그렇게 가게가 동네의 사랑방 역할을 하고 ‘외상 사절’이 붙어 있음에도 외상이라는 말을 꺼낼 수 있어서 사는 게 덜 퍽퍽했다. 지금은 사는 게 푸근한가. 이대로 구멍가게를 영 잊은 채 책으로만 만나야 하는 건가. 점방, 상회, 슈퍼, 마트. 비록 이름은 달라졌지만 여전히 우리네 삶과 가까운 곳이다. 이곳을 드나드는 우리가 덜 외롭고 덜 버겁기를 바란다. 덜 바빠져서 가게 앞에 놓인 평상에 앉아 세상이 흘러가는 모습을 바라보고 싶다. 저마다 다른 삶의 깊이에 빠져들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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