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산교육지원청 삼일초교 조리사 정병연 "6·25 어머니의 헝클어진 시절이 저문다"

6·25 전쟁이 어느덧 70주년을 맞이했다.

대답도, 대안도 없는 우리나라 분단의 현실은 지금 이 시각, 오늘 아침뉴스에서도 메인을 장식하고 있다. 그동안 우리 사회는 모두가 힘을 모아 6·25의 아픔을 오랫동안 깊이 새기고 추념했지만, 아직도 분단의 아픔은 현재 진행형이다.

철조망 넘어 망가진 주인 없는 철모와 기약 없이 헤어진 이산의 아픔, 우리 민족사를 멍들게 한 수많은 사건들, 만약 내 아들이 그 철모의 주인공이라면 나는 지금 어떻게 살고 있을까?

우리 어머니는 매년 이맘쯤 6월 하늘을 바라보며 ‘그물망 하늘’이라고 표현하신다.

아마도 그 시절 철조망처럼 헝클어진 마음의 상처를 표현하시는 듯 했다. 전쟁으로 인해 어머니의 가슴 속 깊이 파고든 아픈 기억들… 또 그 시절 우리 민족의 피해는 얼마나 많았던가?

3년이나 지속된 한반도 전쟁은 실제 전투에 참여한 군인뿐 아니라 민간인 피해도 극심했다고 한다. 또 그로인한 공장, 학교, 도로, 교량 등 시설 복구에는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렸을까?

그 당시 우리 국민이 13만 8천여 명, 유엔군이 4만 8백여 명이 전사했고, 10만 여명의 부상자와 민간인 100만 여명의 부상자가 속출했다. 그리고 10만여 명의 가족들이 전쟁으로 인해 뿔뿔이 흩어지는 참변을 당했다.

우리 어머니는 6,25 참전용사 가족이다. 그때의 이야기를 들려 달라고 했더니 90 연세에도 불구하고 어제 일인 냥 소상하게 기억을 떠 올려 주셨다.

그 시절 어머니의 첫째 오빠이자 우리 외삼촌은 동네에서 돋보일 정도로 총명 했다고 한다.

현역군인이라는 조건으로 우선적으로 징병 되었고 중공군과 밀려내려 오다가 후퇴하면서 적군에 희생 당하셨다. 외삼촌은 동네 입구에 주검으로 놓인 채로 가족들에게 발견됐으며 우리 할머니는 시체더미에서 아들을 발견해 손수 매장하고 장례를 치루셨다. 그 처참한 심정을 이루 말할 수 있을까.

전쟁 당시 적군은 동네 평민 3명을 인질로 붙잡아 가는 등 악행을 저질렀고 그들 중엔 도망가다가 붙잡혀 되돌아오는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또한 상황을 견디지 못해 스스로 생을 마감하는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일부는 적군이 후퇴할 때 까지 땅굴 속에 숨어 음식을 배달해 먹으며 살던 주민도 있었다고 한다.

외삼촌은 다행히 시신을 찾을 수 있었고 장례도, 무덤도, 외할아버지께서 손수 만들어 영혼의 위로를 해 주셨다고 한다. 또한 국가에서 용감히 싸운 전사라 인정받았고 현재 대전 현충원에 모셔졌다고 한다.

최근엔 한국인인지 미국인인지 국적이 불분명한 참전용사들도 유해로 돌아오고 있다. 돌아온 147구의 영령을 최선을 다해 모시는 것이 유가족에겐 한줄기 희망이라고 생각한다.

지금도 어디에서 죽었는지, 살고 있는지를 몰라서 애타게 기다리다가 그냥 죽음으로 인정하고

제사를 올리는 그때의 참전용사 가족들의 사연도 가끔 들리곤 한다.

국민이 단합해도 모자를 이 시국에 정치권, 사회단체들은 좌파, 우파, 진보, 보수다 하여 사분오열 돼 있어 참으로 안타까운 현실이다.

6·25 전쟁의 아픔이 떠오르는 오늘. 근거리에 있는 부곡동 성호공원 6·25 참전용사 묘비에 숙연한 마음으로 짧은 묵념을 하게 된다. 어머니가 ‘그물망 하늘’이라 표현하셨던 헝클어진 그 시절이 기억 속에 저물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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