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이란 무엇인가. 의식주를 벗어난 문제여서 생존에 꼭 필요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없으면 안 되는 그 무엇을 우리는 예술이라 부른다. 예술의 정체성은 사회가 복잡할수록 규정하기 힘들어진다. <작가미상>(감독 플로리안 헨켈 폰 도너스마르크)은 189분이라는 긴 러닝 타임 동안, 주인공이 예술관을 완성해 나가는 30여년의 삶을 좇으면서 복잡하고도 어려운 질문을 풀어간다.

영화는 연대기적 구성을 취한다. 쿠르트의 삶이 독일의 복잡한 역사를 관통하고 있기 때문에 시간의 흐름을 따라가는 게 자연스러워 보인다. 1937년, 이모 손을 잡고 미술관에 간 어린 꼬마 쿠르트는 혼란스럽다. 칸딘스키의 작품에 눈길이 간다. 그런데 해설사는 칸딘스키의 작품을 비싸게 사들인 것은 잘못이라고 격앙된 목소리로 말한다. 독일 민족의 영원한 가치를 대변하지 못하는 미술품은 현재에는 가치가 없다고 주장하면서 말이다. 영화는 초반부터 질문을 안고 시작하는 셈이다.

이모는 일찍부터 쿠르트의 재능을 알아보았다. 드레스덴 미술관으로 그를 데리고 가고, 당시 금기시했던 ‘퇴폐예술’(독일에서 현대미술을 지칭하는 용어)의 느낌을 전달해 주려 한다. 다 같이 울려주는 경적에서 음악적 환희를 느끼는 엘리자베스 이모는, 소리에서 느끼는 그 알 수 없는 감흥을 주려고 퇴폐주의 화가들이 그림을 그리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이 기억은 그에게 선명하게 남는다. 가끔 정신 이상을 보이는 이모가 인종개량프로젝트에 의해 끌려가면서 남긴 말도 그의 예술관을 지배한다. “절대 눈 돌리지 마, 쿠르트. 진실한 건 모두 아름다워.”

이모의 부탁으로 쿠르트는 뭐든 정면으로 응시한다. 이모 면회를 간 병원 모습이나, 드레스덴에 떨어지는 폭격을 뚫어지게 목격한다. 가스실에서 죽어갔던 이모의 불행이나 성장하면서 자기 자신이 나아갈 길까지도 깊은 시선으로 바라본다. 간판을 그리던 그는 책임자의 조언대로 예술학교에 입학하는데, 그의 실력은 교수의 눈에 든다. 누구나 부러워하는 벽화를 그린다. 사회주의리얼리즘을 강조한 그림들은 그의 예술적 갈망을 채워주지 못한다. 피카소도 퇴폐적인 그림을 그리는 화가로 취급하는 분위기에서 그는 답답함을 느낀다. 예술을 하려면 예술을 볼 수 있어야 한다. 결국 그는 동독에 있으면 당원도 되고 잘 살 수 있음에도 보장된 안위를 다 던지고 서독으로 탈출한다.

아내와 함께 서독으로 탈출한 쿠르트는 현대미술이 발달한 뒤셀도르프 대학으로 찾아간다. 이미 회화는 지는 예술이라며 행위예술을 표방하는 곳에서 그는 이런저런 시도들을 해보지만 여전히 답답하다. 그의 작업실을 방문한 페르텐 교수는, 폭격기 추락으로 다친 자신을 구해준 몽골 원주민의 이야기를 꺼낸다. 자기들을 해치려던 페르텐을 지방과 펠트로 감싸 살려낸 그들에 대한 기억으로 교수는 끊임없이 지방과 펠트로 작업한다고 한다. 그러면서 쿠르트에게 “네 작품에는 네가 없다. 나는 네가 있는 작품을 보고 싶다.”고 주문한다.

교수의 말을 듣고 난 쿠르트는 지금까지 해온 모든 작업을 버리고, 캔버스 앞에 다시 앉는다. 그리곤 아내 엘리 아버지 같은 의사들에게 죽어갔던 이모도 소환하고, 아내 모습에 이모의 이미지를 투영하기도 한다. 1966년, 기억을 불러와 그림을 그리고, 그 그림을 지우면서 시간의 흐름을 표현한 그만의 방식은 드디어 환영을 받는다. 그런 그가, 예술에서는 ‘나, 나, 나’가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국가사회주의 사회에선 결코 찾을 수 없는 진리다.

<작자미상>은 실존 인물 게르하르트 리히터를 바탕으로 각색한 영화다. 한 개인이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정치색을 배제하고 예술관을 확립하기까지 30여년의 세월이 걸렸다. 도움을 준 사람이 있었고, 예술에 대한 치열한 고민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쿠르트에게 예술이란, 진실을 표현해 내는 통로이기도 하다. 정치인 포스터를 태우며 예술에 투표하라던 페르텐 교수의 행동은 예술의 힘을 강조한다. 쿠르트의 그림을 보고, 전범 처리를 끝까지 하려는 눈을 피해 살아남은 아내의 아버지가 비로소 불편해 한다. 법으로도 할 수 없는 일을 예술이 했다. 예술은 어쩌면 진실의 최후 보루일 수도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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