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영숙 안산환경미술협회장

마네(에두아르 마네 Édouard Manet 1832-1883)의 아버지는 법관이었다. 당연히 마네가 그림을 그리는 것을 반대했다. 그때나 지금이나 자식 이기는 부모 없듯이 결국 마네는 쿠튀르의 아틀리에로 들어간다. 그러나 아카데믹한 역사 화가인 스승의 스타일이 맘에 들지 않아 예전 루브르미술관에서 벨라스케스와 할스를 모사(模寫)하면서 쌓은 실력으로 자신만의 자유로운 화풍을 만들어낸다. 마네는 1863년 ‘풀밭 위의 점심’을 살롱전에 출품한다. 그러나 입상하지 못하고 1865년 ‘올랭피아’를 출품해 간신히 살롱전에 입상하게 되는데 이때부터 마네의 고단한 예술 세계가 시작된다. 수없이 많은 사람이 ‘풀밭 위의 점심’과 ‘올랭피아’를 그린 그를 조롱했고, 연일 신문에는 마네의 그림들을 풍자하는 카툰과 기사가 실렸다.

벌건 대낮의 공원에 벌거벗은 여자를 신사들 사이에 배치했다는 이유만으로도 비난의 대상이 되었던 ‘풀밭 위의 점심’이 혹독한 유명세를 치르더니, 이제 살롱 입선작인 ‘올랭피아’로 평론가들에게 “노란 똥배를 가진 여자를 그려놓은, 불쾌한 오달리스크화”라고 극심한 비난을 받는다.

마네는 자신을 옹호하는 평론을 써 주었던 에밀 졸라와 소설가 프루스트, 시인 보들레르에게 자신의 고통스러움을 자주 토로했다. 그럴 때마다 에밀 졸라, 프루스트, 보들레르는 마네를 응원했다.

세상에서 먹을 수 있는 욕이란 욕은 다 먹어버린 마네. 그는 실망하고 주눅 들어 그림 그리는 것을 포기했을까? 그렇지 않다. 오히려 그는 새로운 혁신으로 세상을 뒤집을 준비를 하고 있던 풋내기 화가들(나중에 인상주의 화가들이 되는)을 정신적으로나 물질적으로 지원해주는 선배의 역할을 하며 자신의 예술 가치를 꾸준히 이어간다.

1880년 마네는 절친이자 미술품 컬렉터인 샤를 에프 루시에게 ‘아스파라거스 다발’을 판다. 800프랑이 그림의 가격이었지만 그림이 너무 맘에 들었던 샤를 에프 루시는 마네에게 1,000프랑을 지불 한다. 자신의 그림을 맘에 들어 하며 웃돈을 얹어 준 ‘절친’에게 고마운 마음을 표현하고 싶었던 마네. 마네는 그림 한 점을 더 그려 보낸다. 그리고 그 그림에 이런 메모를 동봉했다.

“선생님이 사가신 그림에서 한 줄기가 빠졌더군요!”

다발에서 떨어져 있어서 그랬을까? 그림 속 아스파라거스가 시들시들해진 듯한 느낌이 들지만, 마네의 ‘우아한 유머’는 그가 사람들을 대하는 방식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그는 주변 사람들에게 자주 따뜻하고 배려심 넘치는 행동을 했다. 특히 가난한 모네와 인상파 후배들을 끊임없이 지원해주었다. 마네가 인상주의 스타일의 그림을 한 점도 그리지 않았지만 ‘인상주의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이유다.

시대를 앞서간 화가 마네. 끊임없는 조롱과 비난 속에서도 그를 지탱하게 한 건 세상에 관한 관심과 감사를 자기만의 방식으로 표현했기 때문이 아닐까?하고 싶은 걸 하자. 하고 싶은 말은 하며 살자. 이왕이면 품위 있게

이 세상 사람들이 뭐라 해도 그리고 싶은 걸 그리자.

적어도 내가 좋아하는 것을 그리고 자신 있게 살자.

나에게 떳떳하게! 세상 사람들 눈치 보지 말고 아 그리고 한가지 주당들은 참고하시면 좋을 듯 콩나물국이 숙취 해소에 좋다고 하는데 그 이유는 아스파라긴산 때문이다.

아스파라거스에는 그 함유량이 콩나물의 약 1,000배라고 한다. 어려운 세상 한잔한 다음 날 아스파라거스는 어떠하실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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