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력적인 영화 한 편을 만났다. 끝난 다음에 비로소 내 머릿속에서 이야기가 왕왕대는 영화를 말이다. 영화의 스토리는 단순하지만 생각의 가지는 마음껏 뻗어나간다. 인간의 상상력은 오래 전부터 우리 은하계 너머를 생각하게 했고, 이제 우리는 외계와의 접촉을 염두에 두어야 할 시점이다. <컨택트>(감독 드니 빌뇌브)는 바로 그 지점에서 시작한다.

어느 날 동시에 지구 열두 곳에 정체불명의 우주선이 정박한다. 폐기물도, 가스도, 방사능도 배출하지 않는 우주선이 지구에 온 목적을 밝히는 과정이 영화의 큰 줄기다. 그 과정에 언어학자인 루이스 뱅크스와 이론 물리학자인 이언 도널리가 투입된다. 루이스는 차근차근 단서에 접근해 간다. 외계 생명체의 언어를 ‘무기’로 알아들은 나라들은 비밀을 밝혀내기 위해 연대했던 교신을 끊고 독자 노선을 걷는다. 전쟁 불사까지 내세우는 나라도 있다. ‘무기’라는 말에 다른 의미가 있음을 직감한 루이스는 외계 생명체 헵타포드들과 접촉하고, 선물을 받는다. 이 선물로 루이스는 외계와의 전쟁을 막고 세계 화합을 이루는 데 도움을 준다. 외계 생명체는 3,000년 후에 인류의 도움이 필요하다며 사라진다.

테두리는 SF물이지만 포장지를 벗기면 영화는 다양한 이야기 조각을 가지고 있다. 뒤죽박죽인 사건 순서도 영화를 다 보고 나서야 우리가 익숙한 흐름대로 잡힌다. 미래를 볼 줄 아는 헵타포드들은 우리와 사고 체계가 다르다. 그들은, 과거와 현재, 미래를 다 보아 언어로 표현해 내는 데 2초밖에 안 걸린다. 그 모든 것을 지금, 여기로 소환할 능력이 있기에 그들에게는 처음과 끝이 별 의미가 없다. 사고 체계에 영향을 받아 원형으로 표현되는 그들의 언어에는 시제도 없다.

루이스가 선물로 받은 무기는 시간을 여는 능력이다. 그들과 접촉하면서 조금씩 보던 환영의 실체는 바로 미래였다. 뿐만 아니라 헵타포드어를 알게 된 그녀는 그들처럼 사고의 방식을 바꾼다. 그녀의 시간은 미래로만 흐르지 않는다. “사용하는 언어가 생각하는 방식을 결정하고, 사물을 바라보는 각도를 바꾼다.”는 영화 속 대사처럼, 그녀는 남아 있는 여정을 알면서도, 그 모든 순간을 기쁘게 맞이한다. 그 삶의 끝을 알면서도 지금 느끼는 감정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우리가 살아낼 삶은 현재에만 있다는 듯이.

현재는 시간의 총합이다. 헵타포드들에게 과거와 미래와 현재가 한 덩어리로 뭉쳐 있는 것처럼, 지금에는 모든 시간이 들어 있다. 우리는 실재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현재 속에는 기억과 살아낸다는 현상과 다가올 가능성이 동시에 포함되어 있다. 딸과의 이야기의 시작과 끝을 알지만 “난 순간들의 한가운데서 널 기억해.”라고 말하는 루이스의 기억법을 이해한다. “사소한 일들이 기억의 작은 흐름 속에서 곧 이야기를 만들어내죠.” 이탈리아 노랫말처럼 언제든 우리는 부재 속에서도 기억으로 살아갈 수 있다. 씨앗이 꽃의 한 생을 걸머쥐고 있는 것처럼, 기억은 남은 사람이 계속 피워낼 나머지 삶의 발화점이다. 이 삶 너머, 우리가 사는 세계 너머에도 이야기는 존재하니까.

‘소통’도 영화가 가진 여러 이야기 조각 중 하나이다. 다른 사람들이 실패한 헵타포드들과의 소통에 루이스는 어떻게 성공했을까. 그녀는 기본에 충실했다. ‘인간’을, ‘나, 루이스’를 언어(문자)로 알리려 했다. 서두 없이 목적만을 캐내려는 무리들과는 다른 선택을 한 것이다. 언어는 소통의 기본 수단이다. 외계 세계와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다. 언어가 통해야 너를, 우리를 알아갈 수 있다. 결국 영화는 기나긴 시간을 거쳐 언어를 통해 소통하는 과정을 이야기했다. 화합의 메시지와 함께 외계 생명체가 남기고 간 것은 소통의 도구다. 루이스가 체득한 헵타포드어 덕분에 미래에는 그들과의 소통에 큰 어려움이 없을 것으로 보인다. 시의 적절한 소재다.

그렇다고 결말만을 보기 위한 영화는 아니다. 루이스가 자기 미래를 알면서도 현재의 감정에 충실한 것처럼, 영화의 결말은 단순하지만 그 과정은 풍부했다. 두 개의 바퀴를 달고 흐르는 영화에서 외피와 내피를 구별할 필요는 없다. 루이스의 사유를 빌려, 우리는 영화를 장면들로 기억해도 충분히 즐길 수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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