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산환경미술협회 김영희 이사

조선 후기를 대표하는 거장 겸재 정선. 그리고 그를 대표하는 작품 인왕제색도. 여기서 인왕이란 인왕산을, 제색은 비가 그친 후 펼쳐지는 경치를 말한다.

조선의 역사를 세세하게 담아낸 승정원일기에 따르면, 인왕산을 그린 날짜는 ‘인왕제색 신미윤월하완’이다. 즉 1761년 5월 하순이라는 것이다. 또한, 장맛비가 일주일 내내 내렸고 25일 오후에 그쳤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76세에 이른 정선은 폭우가 물러간 뒤, 맑은 빛에 둘러싸인 인왕산을 바라본다. 취록헌에서 습기가 배어버린 화선지를 넓게 펼친다. 눅눅한 질감은 아랑곳하지 않은 채, 무섭게 몰입하여 획을 그어낸다. 화폭을 무채색으로 물들여간다. 죽마고우인 이병연의 쾌유를 위한 간절한 기도를 담아서 말이다.

정선은 붓질 위에 붓질을 더했다. 이미 먹이 스민 종이 위에 한 번 더, 두 번 더 먹을 보탠다. 정선은 그렇게 인왕산의 생명력을 표현해냈다. 그리고 그림의 오른쪽 아래에는 이병연의 집을 그려두었다. 약동하는 산천의 기운이 친우의 몸에도 깃들기를 바랐던 것이다. 그러나 정선의 염원에도 불구하고, 이병연은 사흘 후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국보 216호로 지정된 인왕제색도는 흔히 조선 후기 진경산수화의 걸작으로 일컬어진다. 진경산수화란 우리나라의 강산을 직접 답사하여 그린 그림으로, 개인의 감성과 느낌을 강조했다는 것이 중요한 특징이다.

지금의 정독도서관 부근에서 인왕산을 바라보며 느낀 인상을 실감 나게 표현한 인왕제색도. 이를 찬찬히 살펴보면, 화면 중앙의 바위에서 압도적인 중량감이 느껴진다. 봉우리와 능선들에서 나타나는 흑백의 자유로운 변화가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무리 지어 싱그러움을 뿜어내는 나무들과 신비롭게 피어오르는 물안개로 절경의 운치를 표현해냈다. 나아가 높은 산은 올려 보고 집은 내려보는 구도를 채택하여 자신만의 독특한 화풍까지 만들어냈다.

필자가 감히 상상해보건대, 정선은 이병연의 죽음 이후 <경교명승첩>을 꺼내어 넘겨보았을 것이다. 두 대가의 ‘컬래버레이션’으로 탄생한 작품이기 때문이다. 그리고는 <시화상간도>에서 오랫동안 시선을 떼지 못했으리라. 그림 속에 있는 친구와 자신은, 여전히 마주 앉아 즐거이 정담을 나누고 있으니 말이다. 자신이 그린 그림에 이병연이 시를 붙이고, 이병연의 시에 자신의 그림으로 화답한다. 서로의 예술 세계를 드러내고 받아들이며 깨우치던 시간이 주마등처럼 머리를 스쳤으리라. 깊은 우정을 비유할 때 쓰이는 ‘백아절현’이라는 고사성어는 이들을 위한 말이라 하겠다.

또 한 가지 엉뚱한 생각이 뇌리를 스친다. 평생의 친우를 위해 그린 인왕제색도는, 오히려 이병연이 정선에게 준 마지막 선물은 아닐까? 그 시공간에 그러한 상황이 있지 않았더라면, 겸재는 다른 일을 하고 있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미술사에 큰 발자취를 남긴 그들의 이야기에 잔잔한 감동을 하는 오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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