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영주 수필가

우연히 예전 일기장을 들춰봤다. 새댁에서 두 아이의 엄마로 산 시간을 담은 기록. 참 새롭고 애틋했다. 쭉 넘기다 보니 혼자 읽기 아까운 내용이 보여 사진으로 찰칵. 아이들에게 보내줬더니 곧 격한 반응이 왔다.

정말 그랬냐. 진짜 신기하다. 찾는 대로 보내 달라. 찾긴 뭘 찾나. 그 무렵의 주인공은 아이들이라서 하루하루를 적은 내 일기에도 그들은 주인공이었다. 지혜네 혹은 지원이네로 불렸던 그 시절에 나는 엄마라서 무조건 행복했다.

‘아이를 키우는 일은 기도를, 감사를 반복하는 일인 것 같다. 제 때에 웃고, 기고, 걸어 다녀야 마음이 놓이는 까닭이다. 저 아이들의 삶은 늘 초록색이기를 바란다. 또 그래야 하고. 부모로서 예의를 잊지 않고 잘 키우고 싶다.’

아이들이 집을 떠나도 이 마음은 여전할 거다. 어쩌면 그 깊이와 농도는 더 깊어질 지도 모른다. 한껏 좋아하는 모습에 잠시 멈춘 일기를 다시 써볼까 생각하며 어제의 기억이 다름 아닌 오늘이라는 말을 실감한다.

내가 글로 아이들을 담았듯 전몽각 작가는 사진으로 아이들을 담았다. 사진 찍기를 무척이나 좋아하던 그는 아마추어의 한계를 느끼면서도 카메라를 놓지 않았다. 훗날 한 권의 사진집을 만들어 작은 전기로 남기고 싶다는 꿈이 윤미가 태어나서 시집가던 날까지를 담은 《윤미네 집》(포토넷)이 된 거다.

그는 딸 하나 아들 둘을 키우면서 여느 집과 다를 것 없는 ‘윤미네 집’을 이룬다. 그저 안고 업고 뒹굴었고, 간질이고 꼬집고 깨물었다. 아이들의 깔깔대는 웃음소리가 온 집안에 가득해서 사람 사는 집 같았다. 시간이 가고 날이 가는 줄도 모르게 세월이 흘렀다.

그런 아이들의 웃음까지 고스란히 담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사진은 그저 시각적인 표현이라는 한계를 넘기 위해 애꿎은 필름이 수없이 버려진다. 결국 그는 카메라 렌즈에 아버지의 시선을 얹고 충실한 방관자로 기다린다.

아이들은 항상 새롭고 독특한 모습으로 답했다. 연출에 의한 게 아니라 있는 그대로 싱싱하게 빛났다. 눈도 뜨지 않은 갓난아이가 때가 되면 눈을 맞추고 이름을 부르면 고개를 돌리는 그런 모든 게 기적이었다.

가정을 꾸린 사람들은 누구나 자기의 가족을 소중하고 특별나며 남다르게 느낀다. 그도 사랑하는 아내와 윤미, 윤호, 윤석과 하나하나 이루어 낸 ‘윤미네 집’이 언제나 큰 기쁨이라고 했다.

나도 ‘지혜네 집’에서 아이들의 존재만으로 행복한 삶을 살았다. 바른 부모의 모습을 보여 주기 위해 노력했고 좋은 벗이 되길 희망했다. 다른 길은 다 헤매도 아이들을 사랑하는 그 마음만큼은 잃지 않았다.

딸들은 일기를 읽고 내가 얼마나 자기들을 사랑하는지, 자기들이 얼마나 사랑받고 컸는지 느꼈다고 했다. 그동안 흐릿했던 과거가 선명히 떠올랐다고 했고 앞으로는 자신들이 받은 만큼 더 많이 사랑하겠다고 말했다.

시간은 많은 것을 가져간다. 그 끝에 남는 것은 무엇이어야 할까. 윤미는 숱한 기억과 이야기를 간직한 ‘윤미네 집’이 있다. 내 딸들은 엄마의 글씨로 기록한 ‘지혜네 집’과 ‘지원이네 집’이 있을 거다. 기억과 망각 사이에 사진이 있어서 잊혀 가는 것을 떠올리게 하고, 다시 숨 쉬게 할 거라는 그의 말이 어느덧 나의 말이 되어 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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