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때보다 자존감에 관심이 많다. 자존감이 높지 않으면 학교나 가정은 물론이고 사회생활까지 문제가 있을 거라고 한다. 상처나 외로움 혹은 가난 때문에 자존감을 잃은 사람에게 용기를 북돋아 줄 수는 없는 걸까. 그 대답이 《존재, 감》(김중미 글, 창비)에 있다.

글쓴이는 약하고 보잘것없고 지질하기 짝이 없던 자신의 과거를 꺼낸다. 지금처럼 약자를 위해 목소리를 내는 게 가능했던 건 사회적인 관계 속에서 있는 그대로 인정받고 존중받은 덕분이었다.

그래서 이 책은 평범한 우리들의 특별한 이야기로 넘친다. 자기 집 마당을 찾은 작은 새를 주인공으로 맨 앞에 갖다 놓은 그다. 모든 존재의 가치는 똑같다고 여기는 사람이니 그 뒤를 이을 주인공은 누구일지 짐작이 가능한데 역시나 예상을 빗나가지 않는다.

어떻게 사는 게 잘사는 거냐고 물었더니 평화롭게 살려면 시끄럽고 소란스러운 과정을 거쳐야 한다는 답이 온다. 이왕이면 세상에 균열을 일으키고 부당한 일에 ‘아니요’라고 말하는 사람이 되란다.

나는 그렇게 말한 적 있었나. 이십 대로 돌아가 직장 초년생인 나를 찾았다. 좋은 회사라는 말에 어울리지 않게 여직원들에게 야한 말을 일삼는 윗사람이 있었다. 앞에선 억지웃음을 짓고 뒤에선 흉을 보는 선배들을 보며 은근히 걱정했던 나.

아니나 다를까. 음담패설이 습관이 된 사람이 막내라고 봐 줄 리가 있나. 듣기 거북한 말이 오기에 민망하니 그런 말은 하지 말라고 부탁을 드렸다. 그 사람, 아버지 같아서 하는 말이라나.

세상의 어느 아버지가 딸에게 ‘너의 몸매가 이렇다 저렇다.’ 한다던가. 한 마디로 상황을 끝냈다. “우리 아버지는 그런 말씀 안 하세요.” 돈 때문에 그런 굴욕감을 참으며 다니긴 싫었다. 아무도 나서지 않을 때 내가 나를 보호하고 싶었다. 설령 부모님이 아신다고 해도 야단맞지 않을 것 같았다. 글쓴이가 과한 복장 규정에 부당하다고 느낀 고등학생 딸을 응원했듯이 말이다.

그 날의 내 행동에 대해 사람들은 반으로 나뉘었다. 아무리 그래도 윗사람 아니냐. 아니다, 쉽게 보이면 못쓴다. 버릇이 없다고 본 사람은 나를 미워했고 자기 목소리를 냈다고 칭찬한 사람은 나중에 더 좋은 직장으로 연결까지 해줬다.

어쨌든 추근대는 사람이 없어서 편하게 일했다. 어떤 행동에 대해 사람들은 각자 나름대로 생각한다는 것을 알았다. 뭐든 스스로 나서야 원하는 걸 얻을 수 있다는 것도 배웠고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건 나라는 걸 깨달았다.

내가 중심을 갖고 옳다고 생각되는 일을 할 때는 굳이 주위의 반응을 볼 필요가 없었던 거다. 그 이후 정말 아니다 싶으면 정색을 한다. 까칠하게 굴어야 할 때 가만히 있는 건 나 자신에게 비겁한 일이니까.

나는 글쓴이와 닮았다. 낯을 가렸고 결핍을 숨기려는 자기 방어가 심했다. 세상을 삐딱하게 봤고 계속 질문을 던지면서 여기까지 왔다. 그가 다시 묻는다. 어차피 한 번밖에 못 사는데 덜 가지고 불편해도 이웃들과 웃고 떠들면서 서로 돕고 나누면서 가자고. 작고 여린 이들의 존재감을 한껏 드러내는 데 힘을 쏟은 그의 진솔한 말에 내가 움직이는 게 느껴진다. 까칠하되 손을 내밀어 안아주자.

저작권자 © 반월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