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청률 고공행진을 이어가던 드라마 ‘부부의 세계’(연출 모완일)가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빠른 전개와 파격적인 사건으로 매회 긴장감을 조성하며 시청자를 쥐락펴락하던 드라마는 ‘부부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지고 마침표를 찍었다. 16부작을 달려오면서 도가 지나쳐 보이는 장면들이 여럿 있었음에도, 끝나고 난 다음에 던져진 질문에 마음이 묵직하다. 때마침 부부의 날이 코앞이다.

평안했던 가정에 어느 날 핵폭탄이 터진다. 직장에서나 가정에서나 완벽한 생활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 지선우에게 위기가 닥쳤다. 남편이 외도를 한 것이다. 치열하게 사랑했기에 선우에게 남편의 외도는 용서가 되지 않는다.

한 번만 봐달라는 남편을 인생에서 완전하게 도려내려고 애쓰지만 자꾸 위기가 온다. 이혼 후에도 아들 준영이가 있기에 부부로 연결된 끈은 쉽게 끊어지지 않고 서로의 바닥을 보며 상처를 주고받는다. 분노하고 좌절하고 파괴하는 선우의 행동을 이해하면서도 한편으로는 피로감이 쌓인다.

선우의 대응 방식을 보면서 나탈리가 계속 떠올랐다. 본지에 이미 소개한 바 있는 ‘다가오는 것들’(감독 미아 한센-러브)의 나탈리는 선우와는 많이 다르게 행동한다. 고등학교 철학교사인 나탈리는 의사인 선우와 마찬가지로 누구보다 열심히 사는 사람이다. 본인을 위해서나 가정을 위해서나 쉼 없이 노력하는데, 외도한 남편이 이혼을 요구한다.

다른 사람을 사랑한다는 남편의 말에 왜 알게 했냐고 반문할 정도로 관계를 지키고 싶어 한 그녀였지만 이별 앞에서 깔끔했다. 남편이 떠난 것을 제자 앞에서 ‘정말 자유’라고 너스레를 떨면서 품위를 잃지 않는다. 담담하게 지금껏 살아낸 것처럼 변화를 최소화하며 학교에 나가고 책을 읽으며 산다. 잘못을 따지느라 에너지를 소모하기보다는 변화를 받아들인 다음, 혼자 치유해 나가는 것이다.

나탈리의 반응은 남다르다. 이는 오래도록 ‘남의 입장을 이해하는 것이 가능한가’에 대한 철학적인 질문들을 스스로 해 온 사람이기에 가능한 태도일 수도 있겠다. 자신을 채워가며 남편을 놓은 나탈리에게는 추억을 돌아볼 여지가 있다.

영화 마지막 부분에서 손주에게 들려주는 자장가를 음미하는 나탈리의 모습이 인상적이다. “~ 오래 전 사랑했던 당신을 나 잊지 않으리. 나는 연인을 잃었다네. 그럴 일도 아니었는데” 선택의 순간이었던 그 때를 되돌아볼 수 있다는 건 희미하게나마 사랑을 기억하는 방법이다.

나탈리의 여운을 알기에, 감정의 끝까지 달려본 선우가 “하찮은 감정에 매달려 가장 중요한 것을 잃었다.”고 깨닫는 부분이 아프다. 관계가 끝났다고 해서 무조건 추억을 폐기처분할 필요는 없다.

이별하는 과정에서 ‘자기’를 잃어버릴 정도로 모든 것을 쏟아버린 선우. 치열하게 사랑했던 시간들은 과연 어떤 추억을 남길 수 있을까. 선우 말대로 “삶의 대부분을 나눠 가진 부부 사이에 한 사람을 도려내는 일이란 내 한 몸을 내줘야 한다는 것. 그 고통은 서로에게 고스란히 이어진다.”면 자기에게 조금만 더 관대했다면 좋았겠다.

살아오면서 나 또한 배우자가 외도할까 봐 걱정한 때가 있다. 물론 앞으로도 그럴 수 있다는 걸 안다. ‘부부의 세계’나 ‘다가오는 것들’이 무조건 남의 세상 이야기는 아니다. 만약 그 때가 온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예전에는 선우처럼 복수하고 싶은 마음이 컸다면, 이제는 나탈리처럼 한걸음 물러서서 문제를 바라볼 수는 있었으면 한다. 선택은 어려울지라도 상대를 무너뜨리려고 나까지 피폐해지고 싶지는 않다. 소진된 사랑에 의미를 두기보다는 나의 세계를 덜 다치게 하고 싶은 욕심인 게다.

추억을 지키는 것은 자신을 지키는 일이다. 이별한다고 해서 사랑했던 순간까지 거짓이 되는 것은 아니다. 나탈리가 남편과 함께 보냈던 별장에서 꺾어온 꽃을 시들도록 꽉 붙잡고 있었던 것은 추억에 대한 예의다.

세상에서 가장 가까우면서도 한순간에 멀어질 수 있는 부부라는 관계. 드라마의 여파로 괜히 일어나지도 않은 문제를 놓고 끙끙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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