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능시험이 끝나면 찾아온다던 동규가 정말 그 말을 지켰다. 커피와 함께 들고 온 내 시집 한 권. 일부러 시간을 내서 찾아올 만큼 내가 괜찮은 선생님이었나 쑥스러운 마음에 책을 읽고 토론을 하고 개인적인 고민을 나누던 예전 시간들을 서둘러 불러들였다.

초등학교 고학년 때부터 중학교 내내 지켜본 동규는 생각이 깊고 참 바른 학생이었다. 지금도 〈허생전〉 책을 놓고 매점매석에 대해 이야기를 나눌 때, 이슬람의 히잡 문화에 대해 토론할 때 논리적으로 자기 목소리를 내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나는 도서관에서 유아에게 책을 읽어주거나 고려인 3세에게 그림책을 읽어주고 놀아주는 봉사를 할 때 동규와 함께 했다. 일부러 시간을 내서 나보다도 더 열심히 활동하던 모습이 얼마나 기특하던지.

그동안 자기가 걸어갈 길에 대해 고민하고 노력했다는 말을 들으니 앞으로 어떤 어려움이 와도 잘 헤쳐 나갈 거라는 믿음과 어디에서 무엇을 하든 제 몫을 할 거라는 확신이 생겼다. 그리고 그 길에 도움을 줬다는 게 기뻤고 동규도 나를 그렇게 여기고 있는 것 같아서 고마웠다.

동규 같은 학생과 책을 놓고 만나는 시간은 늘 행복하다. 토론을 하거나 책과 관련된 활동을 할 때 나를 놀라게 하는 생각들이 얼마나 다양하게 쏟아져 나오는지 모른다. 기성세대는 요즘 세대를 걱정하지만 내가 만나는 요즘 세대는 내가 그 나이였을 때 보다 몇 배 더 훌륭하다.

〈선생님, 우리 얘기 들리세요?〉(롭 부예 글, 김선희 옮김, 다른)의 테업트 선생님도 학생들 만나는 시간을 정말 좋아한다. 그는 학생들이 활짝 웃는 걸 보고야 말겠다는 듯 새로운 일들을 벌인다. 그런 선생님 덕분에 아이들은 마음대로 콩을 키워 보고 축구장의 풀잎을 계산하며 수학을 배운다.

선생님 반 천장엔 종이사슬이 붙어 있다. 학생들이 하루를 잘 보낼 때마다 사슬은 조금씩 늘어나고 마침내 사슬이 바닥에 닿은 날 학생들은 온종일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자유를 얻는다.

하지만 눈싸움을 벌이다 눈덩이에 맞은 선생님이 뇌진탕으로 혼수상태에 빠지면서 반에 울려퍼지던 웃음소리는 사라진다. 젊었을 때 레슬링을 하다 가벼운 뇌진탕을 앓았는데 하필이면 그 약한 부분에 눈덩이가 맞았던 거다.

담임선생님과 한 해를 보내면서 이런 저런 상처를 치유하게 된 학생들은 한마음으로 기도한다. 그 기도가 선생님에게 닿았던 걸까. 선생님은 자기를 기다리는 학생들에게 돌아갔고 학생들은 학년이 바뀌었는데도 선생님과 공부할 수 있는 행운을 얻는다.

테업트 선생님을 보면서 나는 어떤 선생님인가 되돌아봤다. 불행히도 나는 재미있는 아이디어가 샘솟는 선생님이 아니다. 학생들은 내가 기계치라는 것, 그림과 노래에 젬병이라는 걸 안다. 오로지 책과 글이 좋아서 자기들 앞에 섰다는 것도 안다. 무엇보다 자기들을 엄청나게 좋아한다는 걸 안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의 부족한 부분을 들어주고 인정하고 채워주는 관계로 만난다. 몇 년 만에 만난 동규는 내가 행복한 선생님이라는 걸 알게 해줬다. 자기 길을 걷는 그 발걸음에 무엇을 줘야 하나. 여전한 내 마음을 준다. 너의 길을 응원한다는 마음을. 훌륭한 사람이 되어 고맙고 기쁘다는 마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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