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눈이 얼마나 자기 세계에 맞춰져 있는지 새삼 실감한다. 165분이라는 꽤 긴 러닝 타임의 영화라 몇 번 망설인 끝에 ‘보이후드’(감독 리처드 링클레이터)를 보고, 수많은 비평가들이 후한 평점을 준 이유가 무엇인지 계속 되짚어 본다. 영화 내적인 건지, 아니면 영화를 만들기까지의 과정 때문이었는지.

12년의 시간을 쌓아놓았다는 영화 속에서 뭔가 많은 것을 찾을 거란 내 엄청난 기대 탓이었을까. 똑같은 등장인물들로 12년의 실제 촬영 기간을 거쳐 완성된 메이슨의 성장기는, 왠지 수많은 찬사와는 달리 내게는 착착 엉겨 붙는 영화는 아니었다. 한마디로, 사춘기를 지난 자녀를 가진 내가 보기엔 좀 싱거운 영화였다. 사랑 영화에 더 이상 마음이 말랑말랑해지지 않으니, 당연한 거라고 해야 하나.

영화는 우리 이웃 어디선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일을 과장 없이 잘 그려냈다. 영혼이 자유로운 아빠 때문에 화를 내다가, 이혼하고 고군분투하는 엄마를 보면 짠하기도 하다. 신발 이리도 울림이 적은 이유가 뭘까. 영화 후반부에 등장해 메이슨의 새 여친이 될 것 같은 애가

“우리가 순간을 붙잡는다고 생각했는데, 순간이 우리를 붙잡는 것 같아.”

라며 던지는 철학적인 메시지가 영화를 관통하고 있었음에도 다시 되돌려 영화를 생각하기가 쉽지 않았다. 우리의 지금이, 혹은 미래의 어느 날엔가의 지금이 분명 지나온 시간들의 축척이어서 우리가 시간을 잡을 수는 없는 일이라는 걸 공감하면서도 왠지 자꾸 겉돌기만 한다. 메이슨의 미래가 이젠 예전보다는 밝아지겠구나 싶으면서도 그냥 그렇겠지 하고 쉽게 덮어버리게 된다.

일상적이기는 하나 섬세하지 않고, 툭툭 던져가는 일상은 다큐멘터리 식으로 이런 일들이 있었어,를 알려 주기에 급급했던 것 같다. 그래선지 여운이 없어 아쉬웠다. 게다가 아빠나 선생님들이 인생을 앞서간 선배로서 메이슨에게 해 준 충고들도 관객에게마저 설교하는 듯했다.

다 맞는 말이지만 고집이 생긴 관객이 들어 주기엔 지루한 경향이 있다. 미국식 정서가 빚어내는 아쉬움도 공감을 방해하는 데 한몫했던 것 같다. 수많은 청소년이 지금 겪고 있는, 혹은 우리가 지나온 이야기를 건성으로 읽어낸 느낌이랄까. 자기 계발서 한 권 읽은 느낌과 비슷하다.

다른 사람의 시선으로 본다면 영화가 어떻게 달라질지 난 모른다. 이혼하고 고군분투하며 남매를 키워 온 엄마가 메이슨을 떠나보내며 “뭔가 더 있을 줄 알았다.”고 혼란스러워하며 흐느끼는 장면은 울컥했다. 그렇게 애썼는데, 결국은 다 떠나는 게 인생이구나 싶다. 그럼에도, 주제를 설명적으로 다루는 이 영화가 자연스럽다는 이유로 극찬을 받는 이유를 찾지 못했다.

18년의 세월을 거쳐 완성된 같은 감독의 사랑 시리즈 영화에 내가 고개를 갸웃거리게 된 것과 마찬가지다. ‘비포 선라이즈’, ‘비포 선셋’, ‘비포 미드나잇’을 거치는 동안 주연배우들을 그대로 쓰면서 사랑 이야기를 했다면 뭔가 던져 주는 한 방이 있기를 바랐는데, 시작의 설렘만 있을 뿐, 완숙한 사랑 이야기는 아니었다. 나중에는 기나긴 대화에 내가 먼저 지쳐 떨어졌다. 내내 아쉬운 점이자, 개인의 취향이나 경험이 녹아들지 않으면 이방인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에 안타까워한 시간이다.

결이 좀 더 고와 등장인물의 숨소리 하나에도 긴장하며 방황과 혼돈, 성숙의 시간을 따라가고 싶었나 보다. 평면적인 전개보다 층위를 쌓아올리는 입체적인 전개를 원했나 보다. 나는 영화광이 아니다.

함부로 평을 긁적이고 있는 나는 ‘보이후드’를 열심히 만든 사람들이겐 무뢰한이나 다름없다. 내적인 요소보다 영화를 만들어낸 그 놀라운 시간에 대한 찬사가 더 컸을 거라는 내 건방진 감상을 누군가가 깨주면 속이 시원할 듯도 하다. 영화 몇 편 보지도 않고 눈만 높아져 큰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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