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이 잠깐 자리를 비울 때마다 반장들은 교탁 앞에서 소리쳤다. 조용히 하라고. 사실 그 소리가 더 컸다. 나는 메아리처럼 되돌아오는 그 말을 하고 싶지 않았다. 일단 나부터 목소리를 낮췄고 다른 반에 방해가 되지 않을 만큼 작게 말하자고 했다. 간혹 큰소리로 말하는 친구가 있으면 손가락을 입에 갖다 댔다. 그거면 충분했다.

그렇게 조금은 다른 반장이 되고 싶었지만 학급비 내라, 숙제 내라, 청소할 때 도망가지 마라. 반장의 일이 여기서 크게 벗어날 수 없었으므로 늘 친구들과 반대쪽에 서야 했고 그 때문에 외로웠다. 도움이 되려고 나선 길인데 종종 길을 잃고 내 뜻과 다르게 상처를 주는 일들이 생기다보니 점점 힘이 빠지고 앓게 되더라.

그러던 중 가사 실습을 했다. 자장면을 만든다는 생각에 붕 떴는데 하필이면 학생회의 일이 생길 줄이야. 쓰린 마음으로 활동을 끝내고 교실에 들어서니 텅 빈 공간 내 책상엔 자장면 한 그릇이 놓여 있었다. 같은 모둠인 친구들이 내 몫을 챙겨 놓은 것이었다.

뭉친 면발을 풀고 있는데 실습을 끝낸 반 친구들이 교실로 들어서며 한 마디씩 했다. 반장아, 많이 먹어라. 불어서 어떡하냐. 천천히 먹어라... 얼었던 마음이 툭 벌어지는 소리를 냈다. 불어터진 면발 때문에 목이 멘 게 아니라는 걸 나도, 반 아이들도 알았다.

〈내게 무해한 사람〉(최은영 글, 문학동네)은 그 날 내 앞에 놓인 자장면 한 그릇을 떠올리게 했다. 무해한 반장이고 싶었던 내 고민과 다시 마주하게 된 책. 글쓴이는 시간이 흐른 뒤에야 제대로 마주할 수 있게 된 그 시절과 시간이 흘러도 사라지지 않고 남아 있는 그때의 마음을 담았다.

미주와 주나, 진희는 단짝이다. 셋은 벚꽃나무 밑에서 같이 사진을 찍고 교환 일기를 만들었다. 하루 종일 실컷 놀았는데도 헤어지기 싫어서 결국 주나네 집으로 몰려가서 밥을 먹고 잠을 잔다.

그들은 생김도 성격도 달라서 서로의 부족한 부분을 채워준다. 이를테면 주나는 자신의 생각을 말로 표현하는 데 서툰 친구들을 챙겼고 진희는 타인의 감정에 예민해서 친구들의 작은 모서리를 쓰다듬어준다.

하지만 이들의 우정은 “난 레즈비언이야. 얘들아.”라는 진희의 고백으로 깨진다. 느닷없는 고백에 주나는 토하는 시늉을 하고 미주는 할머니 댁에 들러야 한다고 거짓말을 한다. 열여덟 번째 진희의 생일날. 그게 마지막이었다. 유서도 남기지 않은 채...

미주와 주나는 친한 친구를 잃은 위로를 다 받았다. 다른 사람들의 눈에 그들은 가장 가까운 친구를 잃은 가여운 아이들이었으니까. 하지만 둘은 정작 위로를 받을 사람이 진희였음을 안다. 무해한 사람이 되려고 혼자 고민을 떠안고 있었던 가여운 친구.

‘그런 밤이 있었다. 사람에게 기대고 싶은 밤. 나를 오해하고 조롱하고 비난하고 이용할지도 모를, 그리하여 나를 낙담하게 하고 상처 입힐 수 있는 사람이라는 피조물에게 나의 마음을 열어주고 싶은 밤이 있었다.’는 글에서 피가 흐른다.

어떻게 무해한 사람이 될 수 있을까. 그 옛날 나는 교탁 앞에 서서 친구들을 바라보는 게 좋았다. 가만가만 책상 사이를 오가고 이야기를 나누던 친구들. 책을 읽거나 종이학을 접던 친구들. 그게 우리라서 무조건 좋았다. 그런 마음으로 사람을 대하면 상처를 주는 일은 없지 않을까. 무해한 사람이 되는 길을 감히 희망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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