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들 인생영화라고 말하던가. 영화 이야기를 쓰겠다고 맘먹을 때부터 계속 뇌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영화가 있다. 지금껏 본 영화 중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는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원더풀 라이프’(원제 After life)다. 지금의 기준으로 보면 같은 감독의 ‘어느 가족’에 손을 더 들어 주겠지만, 영화를 볼 당시의 몰입도나 내 삶에 준 영향력으로 치면 ‘원더풀 라이프’를 빼놓을 수 없다.

종로에 있는 코아아트홀로 달려가던 2001년을 잊을 수 없다. 여섯 살 터울인 작은아이를 큰아이에게 맡기고, 부부 동반 외출을 한 우리가 선택한 영화는 일순간에 나를 사로잡았다. 죽음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이 있었던 내게, 사후 일 주일간 영혼이 머무르는 림보라는 공간이 있다는 설정은 따뜻하게 다가왔다. 더구나 삶과 죽음의 경계에 있는 그 공간에서 생전에 가장 소중한 순간 하나를 고르면, 그것을 영화로 재현해 준다니. 생생한 기억을 안고 저 세계로 넘어가 영원의 시간 속에 있게 된다는 스토리는 위로이기도 했다.

림보 면접관들의 주문을 받고 지난 삶을 곰곰이 되돌아보는 인물들. 그들이 신중하게 선택한 순간들은 너무나 일상적이고 소소하다. 언뜻 보면 쉬운 듯하지만 생을 통틀어 소중한 기억 하나를 선택하는 것에는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다른 기억은 지워지고, 기억 하나만을 안고 다른 세상으로 넘어가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면접관 시오리는 디즈니랜드를 선택했던 중학생에게 뭔가 더 특별한 것을 생각해 보라고 충고하는 것이다. 덕분에 아이는 귀지를 파 주던 엄마 냄새와 허벅지에 기댔던 느낌이 그립다는 특별한 기억을 찾아낸다. 작지만 특별한 기억들은 개개인마다 다른 법이다. 비행기를 타고 구름 사이를 가르며 나르던 즐거움, 여름날 기관사 뒷자리에서 느꼈던 바람의 촉감, 아내와 한 달에 한 번씩 영화를 보자고 이야기하던 기쁨 등등 개개인의 특별한 시간 속에서 추억은 빛이 난다. 영화를 보고 한동안, 아니 지금까지도 가끔 생각한다. ‘나는 무슨 추억을 간직하며 영원의 세계로 넘어갈까?’

한편 림보에 남는 사람들도 있다. 이생에 책임이 남아 있거나 추억을 찾지 못한 사람들은 림보를 떠날 수 없다. 29살 이세야는 과거 속에서 소중한 기억을 찾기에는 너무도 짧은 생을 살았다. 그는 꿈을 재현하고 싶어 했지만 반드시 과거에서 찾아야 하는 규칙에 따라 나머지 자기 삶을 책임지겠다며 림보에 남았다. 세 살 때 떠나 온 아기 옆을 성인이 될 때까지 지켜보겠다는 면접관은 일부러 소중한 기억을 선택하지 않는다. 얼마 전 ‘호텔 델루나’란 드라마를 봤다. 드라마에 등장하는 인물들도 이승에서의 마지막 미련을 털어내고서야 저승행 리무진을 탔다. 삶과 죽음의 사이에 놓여 있는 공간, 이 세계와 저 세계 사이의 완충지대는 그렇게 추억이란 이름을 되새겨보는 곳이자, 책임을 마저 다하는 곳이다. 죽음의 정서가 나라마다 비슷하다.

추억은 관계의 문제이기도 하다. 사후 50년 동안이나 모치즈키는 림보에 남아 있었다. 생전에 쿄코라는 여인과 행복한 추억을 필사적으로 찾아 헤맸지만 못 찾았기에 지레 포기하고 있었던 것이다. 쿄코의 남편 와타나베가 림보를 다녀간 뒤에서야 누군가의 행복이라는 감정 속에 자신이 살아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면접관 모치즈키는 림보를 기억하며 떠난다. 반면 누군가의 기억 속에서 지워진다는 것을 두려워하는 시오리는 끝내 림보에 남기를 고집한다. 둘 다 사랑이란 관계 속에 자신을 기꺼이 던진 것이다.

소소하지만 특별한 추억은 삶의 의미이고, 앞으로의 세계를 살아가게 하는 힘이다. 우리나라에서의 상영 제목 ‘Wonderful life’나 원제 ‘After life’는 추억이 이 세상과 저 세상에서 똑같은 힘을 발휘한다는 뜻이라 해석하고 싶다. 떠난 사람에게나 남아 있는 사람에게나 존재의 의미가 살아 있는 한 추억은 함께한다. 사랑하는 사람들을 떠나보내고도 끌어안고 살 수 있는 이유는 공유한 기억 덕분이다.

19년 만에 다시 보고, 두 번째 쓰는 리뷰. 여전히 영화는 내게 말을 건다, 추억은 소중한 것이라고. 그 사이 사랑하는 가족들을 영원의 세계로 보냈지만 추억의 가치는 더 올라갔다. ‘원더풀 라이프’는 죽음과 추억의 의미를 발효시키며 내내 옆에 있을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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