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가을, 안산시 소장 진 본전 <단원아회, 200년 만의 외출>을 단원미술관에서 전시를 했다. 한국화 작가인 나는 가슴 설레는 큰 기대를 품고 작품들을 마주하게 되었다. 한 벽면에 확대된 그림은 마치 등장인물들의 웃음소리가 들려오는 듯 한 생동감에 도무지 눈을 뗄 수 없었던《균와아집도》의 대단함에 연속적인 감탄사를 내지 않을 수 없었다.

《균와아집도》는 1763년 당대 예술인들의 야유회 모습으로, 그야말로 조선시대 르네상스의 한 풍경이라 할 수 있는 이 그림에는 문인과 화가 8명이 등장한다. 허필의 화제를 보면 책상에 기대어 거문고를 타는 사람은 표암이고, 담뱃대를 물고 있는 이는 현재 심사정이다. 바둑 두고 있는 이는 호생관 최북이고 구석에서 구경하는 이는 연객 허필이며 퉁소를 불고 있는 이는 단원 김홍도이다. 인물을 그린 사람은 단원이고, 소나무와 돌을 그린 사람은 현재다. 표암이 그림의 구도를 배치하고 호생관이 채색을 하였으며 모임의 장소는 균와이다.

단원 김홍도는 스승인 표암 강세황의 배려로 쟁쟁한 화가들의 모임과 친선모임에 참여하였고 이 모습을 그림으로 표현하게 된다. 이 작품은 김홍도가 그린 아집도 중에서도 가장 이른 시기의 인물화라 할 수 있다.

강세황이 김홍도를 위해 쓴《단원기》에서 그들의 인연을 살펴보면 단원은 단순한 사제지간을 넘어서, 생애의 3분의 2에 해당하는 시간 동안 강세황과 더불어 창작 활동을 했던 끈끈한 정을 간직한 필연의 관계인 것 같다.

김홍도는 젖니를 가는 어린 나이부터, 안산에 있는 강세황의 집을 드나들며 그림을 배웠으며 그 당시 그림의 형성 되었고, 화가로서의 인생이 시작되었다. 그 후 강세황의 추천으로 젊은 나이에 도화서의 화원이 되었고 영조의 초상화를 그린 공으로 궁중의 밭과 채소 경영을 관장한 기관인 사포서의 감목관 직책을 맡으며 사제지간에 함께 근무를 하게 된다.

나이가 들어서는 연배와 신분을 뛰어넘는 지기로서 지냈으며 두 사람의 예술 인생에서 서로를 이해하고 인정하는 소중한 관계로 거듭난다.

강세황은 김홍도를 ‘우리나라 금세의 신필’이라 평가했으며, 김홍도의 그림에 주옥같은 화평을 적어 내려갔다. 그러니 김홍도의 그림에 강세황의 화평이 함께하는 작품은 당연히 인기가 높을 수밖에 없다.

스승과 제자가 합작한 그림도 있다. 그 유명한 《송하맹호도》가 그것이다. 호랑이는 김홍도가 그리고, 소나무는 강세황이 그려서 소나무의 기상과 호랑이의 위엄이 위풍당당하다. 노송에는 오랜 세월이 서려있고, 호랑이는 금방이라도 펄쩍 뛰어 달려들 것 같다.

맹자의 군자삼락 중 세 번째는 천하의 뛰어난 인재를 가르치는 즐거움이라 했다. 이는 강세황과 김홍도를 두고 하는 이야기라 할 수 있다. 김홍도처럼 뛰어난 재능을 가졌다 한들, 중인 집안에서 태어난 소년을 누군가 이끌어 주지 않았다면 당대 최고의 화가로 성장할 수 있었을까? 강세황은 단적으로 이야기 한다.

“단원은 모든 분야에 뛰어나 한 세대를 울리며 후대에까지 전하기에 충분하다.” 이런 생각을 가진 강세황이 훌륭한 스승으로서 길잡이가 되었기에 가능한 일 이었을 것이다. 김홍도는 스승의 무한한 신뢰를 통해 신분에 대한 번뇌를 극복하고, 예술의 길에 일로매진하여 역사적 위업을 남긴 화가로 거듭난 것이다. 가슴 깊게 품고 이끄는 강세황과 수많은 걸작을 탄생시킨 김홍도의 사제관계는 참으로 아름다워 우리들이 배우고 실천해야 할 과제로 남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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