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갑자기 아빠가 25센트짜리 동전 꾸러미 세 개와 꾸깃꾸깃한 1달러짜리 지폐만 가득 들어 있는 마요네즈 통을 남기고 사라졌다. 조지나는 그 날이 가장 끔찍한 날로 기억되길 바랐지만 그 다음은 집세를 내지 못해서 짐들이 모조리 길거리에 내던져진 날이 된다. 제발 딱 거기서 자신과 엄마, 동생의 불행이 끝났으면.

그런데 거기서 끝이 아니다. 남겨진 가족이 찌그러진 시보레 자동차 뒷좌석에서 지낸다는 걸 친구가 눈치 챈 거다. 언젠가는 알려질 일이지만 그래도 감출 수 있기를 바랐는데 단정치 못해 보인다나. 주유소 화장실에서 머리를 감고 옷에 묻은 겨자소스를 애써 못 본 척 해야 하는데 그게 가능하냔 말이다.

엄마가 하루 종일 일을 해도, 그것도 두 탕이나 뛰어도 빨리 집을 얻기는 틀렸다. 아무리 어려도 그 정도는 안다. 앵앵 울기만 하면 어른들이 알아서 돌봐주던 좋은 시절은 갔으므로 그녀가 돈을 벌기 위해 분연히 일어서면서 〈개를 훔치는 완벽한 방법〉(바바라 오코니 글, 신선해 옮김, 놀)은 시작된다.

개를 찾는다는 전단지에 붙은 사례금 500달러. 쪼끄만 개를 위해 500달러나 쓴다는 사람들이 있다니 놀라울 따름이다. 그녀가 개를 훔쳐 돈을 벌겠다고 동생과 머리를 맞대고 짠 ‘개를 훔치는 완벽한 방법’은 나름 아주 훌륭하다.

그러나 “세상의 모든 일이 내 뜻대로 되어서 사는 게 참 행복해요.”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보이지 않는 구멍에 빠지기도 하고 구멍인 걸 뻔히 알면서도 빠지는 그런 게 삶 아닌가. 나도 좋은 일이나 나쁜 일이 연이어 일어나는,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안다.

짐작대로 그녀의 계획은 허술하다. 계획만 허술하고 엉뚱한 게 아니라 남의 것을 탐낸다는 양심의 가책이 그녀를 심하게 괴롭힌다. 어찌어찌해서 시작은 했는데 끝을 내기 힘든, 그렇다고 다시 돌아가기엔 늦은 애매한 상태에 빠져버린 거다.

누가 그녀를 구할까. 키다리 아저씨는 아니다. 로또에 당첨되지도 않는다. 세탁소에서 옷을 다리고 치킨집에서 서빙을 하는 엄마가 하루아침에 커리어우먼이 되지도 않는다. 가족을 버린 아버지가 미안하다고 돌아오는 기적도 일어나지 않고.

글쓴이는 엉뚱 기발한 생각을 한 그녀의 마음에 집중한다. 개를 훔치러 갔다가 그 개에게 마음을 줬으니 그 순간에 상황은 끝난 거다. 심지어 개의 주인도 조지나의 속을 아는 눈치다. 그런 의미에서 그녀가 돈을 번다고 생각해 낸 방법은 꼭 개를 훔치는 것이어야 했다. 들숨 날숨을 느끼거나 체온을 나누는 과정에서 오는 온기가 사람을 변하게 하고 힘을 주므로.

혼자서 끙끙댔지만 학교 선생님이나 이웃들은 그녀의 어려운 상황을 알았을 거다. 그녀의 마음이 다치지 않도록 먼저 고백하고 손 내밀기를 기다렸을 뿐. 완벽해 보이는 계획에 허점이 드러나듯 아무도 모를 거라 여겼던 것들도 눈치 채는 사람들이 있다. 아무리 감춰도 결국 드러나는 게 사람의 삶이고 다시 일어날 수 있도록 힘을 주는 것도 사람이라는 것을 안다.

나도 500달러로 해결될 일이라면 그녀처럼 개를 훔치겠다고 나설 만큼 어느 때보다 힘든 시기를 견디고 있다. 하지만 나를 안다. 나도 조지나처럼 개에게 마음을 주고 말았을 거다. 그리곤 ‘너를 어쩌니’라며 다시 되돌려 놓을 방법을 찾았을 거다. 그게 나라서, 어쩔 수 없는 나라서 사랑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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