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에 가면 집이 두 채가 있다. 지금 엄마가 살고 있는 집과 자랄 때 우리가 살았던 집-엄밀히 말하면 집터-, 이렇게 두 채 말이다. 엄마가 살고 있는 집을 지은 지 30년이 되었는데도, 내 그리움은 온통 집 형체가 남아 있지 않은 집터로 향해 있다. 내려갈 때마다 그 땅을 밟고 서서 다 같이 모여 살던 때를 그려봐야 마음이 풀리니, 집에 대한 추억에는 유효 기간을 정할 수 없을 것 같다. ‘집 이야기’(감독 박제범)에도 시간이 오래 머문다.

편집 기사 은서는 집을 찾아 헤맨다. 이미 예닐곱 번의 이사를 한 경험이 있지만, 여전히 새 집을 구하는 것이 힘들다. 발품을 여러 번 팔아도 맘에 드는 집을 구하지 못하자, 은서는 잠시 아빠 집으로 찾아든다. 오랜만에 아빠와 살게 된 은서는 예전의 모습 그대로 술을 마지고 가끔 욱 하는 아빠가 못마땅하다. 문을 닫고 지내는 아빠가 답답해 보인다.

강진철은 우리가 보아 왔던 보통 아버지의 모습 그대로다. 곰살맞게 표현할 줄 모르지만 묵묵히 가족을 책임지고 싶어 하던 가장이다. 좋은 집인 아파트에 입주하기 전까지 여행을 미루고, 안주하게 될까 봐 창문도 내지 않으며 구두쇠 작전을 펼쳤다. 자기만의 기준으로 사는 아빠 밑에서 가족들은 답답해했다. 쫓겨났든, 나갔든 가족들은 모두 집을 떠난다.

비바람을 고스란히 맞으면서도 투정이 없으니, 누구보다 든든한 가장이고 싶었던 마음을 가족들이 알아 줄 리 없다. 내 아버지도 강진철 못지않았다. 배움이 짧아 밖에서 움츠리며 몸 쓰는 일을 했던 아버지는 집에 오면 말이 없었다. 입을 닫은 아버지는 같은 공간에 있어도 멀게 느껴졌다.

집 이야기이지만 결국은 사람, 가족 이야기이다. 집의 형태는 사실 별것 아니다. 은서 친구의 말대로 어디나 정 붙이고 살면 내 집인 것이다. 깃들인 사람들 사이에 온기가 있어야 집도 살아남는 법이다. 다리미까지 풀세팅된 은서의 오피스텔을 본 엄마는, 사람이 살만한 집이 아니라고 한다. “머물라고 있는 집이 아니라, 떠나라고 있는 집 같잖아.” 집은 물건이 아닌, 사람으로 채워가야 하는 곳이다. 은서가 찾고 싶었던 집은 바로 그런 집이었기에 구하기 쉽지 않았다.

아빠에게도 온기가 필요했다. 사람이 빠져나간 집에서 아빠는 점점 창문이 없는 집을 닮아가고 있었다. 떠난 아내에게 한 약속을 떠올리며 달력을 올려다보고, 아이들 사진을 바라보며 외로움을 달랬다. 아빠의 유일한 낙은 자식들 자랑이다. 큰딸이 아파트를 샀다고, 막내딸이 신문사에 다닌다고 자랑하는 아빠 모습은 딸 은서에겐 생경하다.

아빠는 추억 속에 집을 짓고 사는 남자다. 그런 아빠를 가까이에서 지켜보면서 은서가 서서히 변한다. 아빠에게 관심을 갖고 이해하려 든다. 영혼이라도 만족하라고 관에 창문을 내 준 은서를 보며 아빠를 깊이 받아들였음을 눈치 챈다. 내 나이 마흔이 넘어서야 아버지를 비로소 이해했다. 그냥 아버지가 아닌, 한 사람으로, 가장으로 보게 되니, 고달팠을 삶을 따듯하게 안아 드리고 싶었다. 아버지와의 마지막 날들이 참 따뜻하고 충만했다.

주연배우들의 섬세한 연기 덕분에 ‘인간극장’을 보는 듯하다. 은서와 강진철은 실제 인물들처럼 그대로 어디에 살아 있을 것만 같은 딸, 그리고 아빠의 모습이다. 툴툴거리면서도 결국은 아버지에 대한 사랑을 감추지 못하는 딸 은서 역의 이유영, 무뚝뚝한 외투를 걸쳤지만 깊은 사랑을 다 들켜버린 아버지 강진철 역의 강신일. 두 배우의 열연 덕분에 리얼리티가 한층 살아난다.

형식적으로나 내용적으로 새롭다. 유머로 무거움을 덜어내고, 식상함을 피해가며 현실감을 살리고, 불필요한 요소들을 과감히 생략함으로써 묵직한 통증을 세련되게 전달한다. 가방, 창문, 열쇠, 달력 등의 메타포가 잘 녹아든 한 편의 시와 같은 영화이기도 하다.

헤어진 부부 사이지만 서로에 대한 연민이 남아 있고, 여전히 같은 꿈을 꾸고 있는 모습이 아름답다. 보통의 이야기지만 새롭다. 감독의 내공이 만만치 않아 보인다. 그럼에도 관객 동원을 1만 명도 못한 초라한 성적표를 들고 있다는 사실이 아쉽다. 뒤늦게라도 입소문을 탔으면 싶다

참 잘 만든 영화다. 담담하게 따라갔을 뿐인데, 어느 사이 내 맘 가득 아버지가 들어와 있다. 우리 가족의 추억이 영원히 머물러 있을 집도 떠오른다. 때마침 오늘이 아버지 기일이다. 아버지의 새 집에 다녀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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