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이 밝기 전이 가장 깜깜하다고,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기 5년 전인 1984년 동독에서는 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감시가 삼엄했다. “모든 것을 파악한다”는 목표하에 10만 명의 감청요원과 20만 명의 스파이가 사회주의의 적을 색출하기 위해 활동했다. 개혁과 개방의 목소리가 커질수록 숨 막히는 감시가 계속된 것이다.

통제된 사회에서 예술가들의 삶은 쉽게 왜곡된다. 그런 면을 ‘타인의 삶’(감독, 플로리안 헨켈 폰 도너스마르크)은 과하지 않게 꼬집으며 인간적인 삶에 대한 고찰을 한다. 우리나라에서도 이슈화된 문화예술계의 권력 남용과 성상납 문제들이 영화 속에 드러난다.

어떻게든 살아남기 위해 예술가들은 비굴하게 권력에 붙거나, 위험수위를 건드리지 않게 간이며 쓸개며 다 빼주거나, 몸을 주거나 하면서 꼭두각시로 놀아난다. 연출가든 작가든 배우든 권력 앞에서 무너지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그렇게 해서라도 지켜야 할 예술이 있기 때문이다.

비밀경찰 비즐러는 단숨에 문제 인사를 알아보는 눈을 가졌다. 게다가 차분하지만 비인간적으로 취조를 해 원하는 결과를 얻어내는 실력 있는 인물이다. 학교에서는 유능한 비밀경찰을 만들기 위한 수업까지 한다.

그의 능력은 극작가 게오르그와 연극배우 크리스타 부부의 삶을 감시하는 데 쓰인다. 크리스타에 눈독 들인 헴프 장관이 어떻게든 게오르그를 떼낼 명분을 찾고 싶어 했다. 비즐러는 동료와 교대로 24시간 감시하며 그들의 은밀한 사생활까지 다 보고한다.

얼마가지 않아 당의 칼과 방패로서의 신념으로 똘똘 뭉쳤던 비즐러는 흔들리기 시작한다. 헴프의 비리를 눈치 챘고, 게오르그와 크리스타가 속삭이는 사랑으로 삭막한 마음에 파문이 인 것이다.

감시가 계속될수록 새로운 세계에 눈을 뜬 비즐러는 내면의 변화를 외면하지 못한다. 게오르그의 방에서 가져온 브레히트의 시집을 읽는 비즐러는 꿈을 꾸는 듯하다. 타인의 삶에 습자지처럼 스며드는 모습을 보여 준다.

음악은 비즐러를 한 번 더 크게 흔들어 놓는다. 레닌은 베토벤의 소나타 ‘열정’을 계속 듣다가는 혁명을 완수하지 못할 거라고 예견했다. 당은 신념을 흔들어놓을까 봐 각종 공연을 감시하고, 음악을 검열했던 것이다.

반체제 스승이었던 예르스카가 게오르그에게 브레히트 시집이라고 건넨 것은 사실 ‘아름다운 영혼을 위한 소나타’(영화를 위해 작곡된 곡. 실제로 존재하지 않음.)였다. 10년간 활동을 제제 받으면서 신념을 잃고 제자 앞에서 존재 이유도 찾지 못한 예르스카는 죽음을 택한다.

소식을 들은 게오르그는 스승이 건넨 악보로 진혼곡을 쳤고, 이에 비즐러는 감화되어 눈물을 흘린다. 그런 비즐러를 알기라도 하듯 게오르그는 질문을 던진다. “이 곡을 진심으로 듣는다면 나쁜 사람이 될 수 있을까?” 그 동안 신념으로만 움직였던 비즐러를 와르르 무너뜨리는 말이다. 나쁜 사람, 좋은 사람에 대한 고민이 시작된 것이다. 결국 도청을 통해 두 사람의 사랑과 서정, 음악의 긴 행로를 함께한 비즐러가 통째로 변했다.

더 이상 나쁜 사람이 될 수 없었던 비즐러는 기꺼이 위험을 감수한다. 게오르그가 서독 잡지 슈피겔지에 동독 문화예술인들의 자살에 관한 글을 기고해도 보고하지 않는다. 심지어 이들의 사랑을 지켜 주기 위해 수사망이 좁혀오자 타자기를 숨기기까지 한다. 그들의 삶을 더 이상 타인의 삶이라고 모른 채 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 개입 때문에 비즐러는 국가보안부 대위 직위에서 강등되어 우편물 업무를 한다.

뒤늦게 모든 사실을 안 게오르그는 『아름다운 영혼을 위한 안식처』를 비즐러에게 바친다. 자기로 인해 삶이 바뀐 비즐러를 직접적으로 아는 체하지 않지만 더 큰 감동을 안겨 준다. “작가는 영혼을 만지는 수리공”이라는 표현대로 비즐러의 희생은 결국 게오르그에 의해 만져진다. 서점 직원에게 “이 책은 나를 위한 겁니다.” 말하는 비즐러의 눈빛이 또렷하게 빛난다.

영화는 타인의 삶에 예의를 잊지 않는 아름다운 영혼들을 위한 소나타다. 사랑과 예술을 통해 너와 나의 삶의 경계를 무너뜨리고 자기를 내어 준다. 그들의 소나타가 남긴 여운에 기꺼이 취하고 싶은 계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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