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리게, 아주 느리게 시간이 흐른다. 그건 마치 일상의 흐름과 같아서 현실에 살고 있는 누군가의 삶을 훔쳐보는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벌새’(감독 김보라)는 그렇게 천천히 1994년에 대치동에서 살고 있던 은희네, 정확히는 은희를 따라간다. 느린 호흡으로 중학교 2학년인 은희가 우정, 사랑, 이별을 통해 성장해 나가는 모습에 주목한다.

은희네는 사교육 일 번지 대치동에 살고 있다. 많이 배우지 못한 부모가 방앗간을 하면서 대치동에서 버티는 이유는 하나다. 아이들의 교육을 위해서다. 아버지는, 대치동에 살면서 공부를 못해 강북으로 고등학교를 다니는 큰딸 수희를 창피해하고, 아들 대훈에겐 외고를 가라고 강압한다. 공부를 외치면서 정작 정보에는 어두운 모습이 아이러니하다. 실력이 안 되는 아들을 외고로 등 떠밀고, 무조건 학원만 가면 다 되는 줄 알고 윽박지른다. 특히, 영어 교과서도 제대로 읽지 못하는 은희에게 한문 학원을 다니라고 한다.

맹목적이다. 따뜻한 사랑과 관심의 존재가 아닌, 부모의 결핍을 채우는 대상으로서의 자식들이 있을 뿐이다. 힘들게 일하는 것은 다 자식들을 위한 것이라는 아버지의 식탁 훈계는 숨이 막힌다. 가부장적인 아버지, 떡집에서 친절을 다 써서 집에선 베풀 것이 남아 있지 않은 엄마. 바쁜 부모에게 방치된 자식들은 제각각으로 삶을 살아낸다. 수희는 계속 남자친구와 놀러 다니고, 대훈은 아버지가 없는 시간에는 폭력도 불사하며 어린 동생 위에 군림하려고 든다. 수술을 앞둔 자기에게 얹어주는 불고기 한 점에도 웃을 수 있는 은희는 요구할 줄을 모르는 아이로 자란다.

음울한 집에서 밖으로 나와도 은희의 사정은 달라지지 않는다. 공부에 취미가 없는 은희는 학교에서 잠을 자거나 수업 시간에 만화를 그린다. 그런 은희에게 담임선생과 친구들은 정서적인 폭력을 가한다. 아이에게 날라리 프레임을 씌우는 선생이나, 비아냥거리는 친구들은 하나같이 은희를 작게 만든다. 학교에서 홀로 떠도는 섬인 은희에게는 자기 목소리가 없다. 오빠의 폭력에 대항하지 못하고, 누가 좋아한다고 하면 그냥 마음을 열어버린다.

무채색의 은희에게 한문 선생 영지는 특별하게 다가온다. 무엇을 좋아하는지 처음으로 질문을 받은 은희는 만화 그리기를 좋아한다고 수줍게 이야기하며 배시시 웃는다. 영지는 은희가 힘든 일이 있을 때마다 마음을 다독여 준다. 마음을 알아주는 영지 덕분에 비로소 은희는 마음을 아는 사람의 중요성을 깨닫는다. 괴롭히는 사람에게 맞서 싸우는 법과 싫어하는 자기 마음을 들여다보는 법을 배운다. 자기를 지키기 위해 지완에게 좋아한 적 없다고 당차게 말도 한다.

성수대교 붕괴는 또 다른 성장통이다. “어떻게 사는 게 맞을까?”라는 질문은 영지에게서 은희에게 넘어왔다. 나쁜 일들이 닥치면서도 기쁜 일들이 함께 하는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살아 있는 자가 끊임없이 벌새처럼 날갯짓하면서 답을 찾아야 하는 문제를 내주고 영지는 떠났다. 은희는 다시 홀로서기를 해야 한다. 다행인 건 설명할 수 없는 일들이 벌어지면서 가족이 조금 변했고, 은희가 단단해졌다는 것이다.

“제 삶도 언젠간 빛이 날까요?” 은희가 허공에 던진 질문에 감히 답할 수 있다. 상처를 봉합하고 사람을 바라보고, 세상을 읽을 줄 아는 영지라면 지금쯤 어디선가 빛나고 있을 거라고. 철거민의 찢겨진 플래카드를 보고 고민하고, 성수대교가 붕괴된 자리에서 굵은 눈물을 흘릴 줄 아는 은희라면 자기 꿈대로 만화를 통해 사람들에게 위로를 건네고 있을 거라고. 세상을 신기하고 아름답게 보고 있을 거라고.

문득, 궁금해진다. 지금 2020년을 살고 있을 열다섯 또 다른 은희들의 삶은 빛나고 있을까. 삐삐가 휴대폰으로 바뀌었을 뿐, 여전히 1994년 교실에 있을 것만 같은 지금의 아이들에게도 감독은 똑같은 말을 건넨다. 우리에게도 유효한 삶에 대한 질문들. 보편성을 확보한 ‘벌새’가 25관왕을 차지한 이유이자, 뜨거운 관심을 받는 근거이다. 어떻게 살지 모르겠다면 잠시 걸음을 멈추고 은희의 이야기를 들어보는 것도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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