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는 순간, 영화의 처음으로 마구 달려가는 신기한 경험을 한다. 주인공의 내레이션을 뒤로하고 잔잔한 음악과 함께 화면을 채우는 설명과 자필 원고는 평범한 전쟁 로맨스물이 아닌, 특별한 작품으로 영화를 들여다보게 한다.

영화는 소설 원작의 제목을 그대로 사용했다. ‘스윗 프랑세즈’(감독 사울 딥)는 영화 속에서 독일군 중위 브루노가 철수하면서 남긴 자작곡의 제목이기도 하다. 이렌 네미로프스키는 『스윗 프랑세즈』를 쓰던 중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잡혀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사망했다. 그녀 나이 39세 때의 일이다. 그런 상황이었기에 ‘공동체에서의 개인의 갈등’에 주목한 그녀의 작품은 놀랍다. 사울 딥 감독은 반짝이는 작가 정신을 충실하게 영상과 음악으로 담아낸다.

프랑스의 한적한 시골 마을 뷔시에 파리를 떠나온 피난민이 몰려들면서 영화가 시작된다. 피난민에 이어 독일군이 들어오며 뒤늦게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린 뷔시는 순식간에 공포에 사로잡힌다. 마을 사람들은 무기를 빼앗기고, 시계도 독일식으로 움직인다. 독일 화폐를 써야 하고, 9시 이후에는 통행도 제한 받는다. 유대인을 조심하라는 포스터가 나붙고, 거리는 독일군으로 가득하다. 신부는 설교를 통해 “한 가족이 되어야 한다. 분열되어서는 안 된다.”고 목소리를 높이지만, 어디까지나 이상적인 발언일 뿐이다.

젊은 남자들은 거의 전쟁터로 나갔고, 나이든 남자와 여자, 그리고 어린이만 남은 마을에는 구심점이 없다. “인간의 본성을 보려면 전쟁을 보라.”는 말처럼 마을 사람들은 이기적인 본성을 드러낸다. 부자는 창고에 먹을 것을 잔뜩 쟁여놓고, 소작인은 굶주림에 도둑질을 서슴지 않는다. 귀족 신분의 시장은 뇌물을 주고, 모든 사람이 따라야 한다는 규칙에서 제외된다. 마을 사람들은 앞다투어 서로를 처벌해 달라고 독일군 중위에게 고자질을 해댄다. 전쟁은 지극히 평범한 사람도 인간으로서의 품위를 쉽게 벗어던지게 만든다.

끝내 적일 수밖에 없는 두 주인공은 대척점의 끝에서 만난다. 독일군 중위 브루노가 임시 숙소로 배정된 뤼실의 시어머니 집으로 들어온 것이다. 남편 가스통이 전쟁터에 나간 다음 시어머니의 감시 속에 생활하는 뤼실과 독일군 중위면서도 총 한 발 제대로 쏘지 못하는 브루노는 피아노를 칠 수 있다는 공통점으로 서로에게 묘하게 끌린다. 각자 배우자에게 사랑을 느끼지 못했던 둘은 이내 가까워진다. 영화는 부르노에게 집중한다. 뤼실과의 대화에서 드러난 부르노의 면면은 전쟁과는 어울리지 않는다. 군인이 되기 전에 작곡가였던 그는 개인의 행동에서 의미를 찾고 싶어하고, 생명을 사랑하는-버려진 프랑스 개를 데리고 다님.- 인물이다. 최선을 다해 공동체의 정신을 지지하며 버틸 뿐이다. 그는, 뤼실이 독일군을 죽인 브누아를 숨겨준 것을 눈치챘으면서도 눈감아 주고 탈출을 도와준다. 부르노의 진심을 바라볼 줄 알았던 뤼실은 “부끄러운 줄 알라.”는 마들렌의 경고에도 어쩔 수 없이 그에게 빠져들고 만다.

연기가 갑이다. 사랑이라는 말 한 마디 입에 올리지 않고도 미묘하고 복잡하게 깊어지는 두 인물의 감정을 표현해내는 미셸 윌리엄스와 마티아스 쇼에나에츠의 연기가 탁월하다. 입가에 걸리는 희미한 미소, 흔들리는 눈빛, 담배를 문 손 끝, 주고받은 몇 마디 말, 먼 이별일 줄 직감하면서도 절제하며 떠나보내고 남는 모습 등에서 세세한 파동을 느끼며 함께 불안해하고 고뇌하고, 애잔해했다. 덕분에 역사 한가운데 서 있는 개개인의 아픔이 고스란히 잔영으로 남는다. 뤼실이 아무리 잊으려 해도 부르노가 남긴 음악으로 인해 항상 그에게 돌아가듯, 나 또한 아련한 기억으로 이 둘을 오래 붙잡아 둘 것 같다.

전면에 내세우지는 않았지만 결국 영화는, 이렌의 소설은 누군가의 희생을 요하는 전쟁은 없어야 한다고 말한다. 영화에는 전쟁 중에도 보편적 인간에 대한 믿음과 사랑을 잃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 가득하다. 영화를 보고 나니, 원작이 된 이렌의 『스윗 프랑세즈』가 많이 궁금하다. “나치는 어머니의 정신까지 죽일 수는 없었던 거다.”라는 딸의 말대로 그녀의 정신은 영화를 통해 나에게까지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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