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젊은 미술작가들의 ‘느슨한 연결구조’라는 전시회를 다녀왔다. 주제는 ‘불안’이었다. ‘불안’이라는 주제를 선정한 배경은 다음과 같다.

‘불안하다’는 것은 비단 예술가만이 느끼는 일은 아닐 것이다. 우리 모두 불안을 느끼고 있다. 경제적인 자립에 대한 불안감, 이대로 이렇게 살아도 될 것이냐는 불만족한 현실, 내가 믿어왔고 행했던 일이 부정당하지는 않을까에 대한 의심, 불안은 그렇게 삶의 하나의 일부처럼 존재한다. (느슨한 연결구조, 강정아)

불안은 인간이 갖는 본능적인 감정이다. 600만 년 전 부터 인간은 생존을 위해 삶의 정신과 몸을 구조화했다. 우선은 기아와 추위로 부터 자신을 지켜야 했으며, 각종 위험으로 부터 안전을 확보해야 했다. 자연재해와 알 수 없는 현상에 대한 학습효과도 생겨서 자라보고 놀란 가슴 솥두껑 보고도 가슴을 조려야 했다.

선천적이든지 학습효과로 생긴 후천적이든지 인간에게 불안은 진화의 결정적 요소이고 자기를 지키는 힘이었다. 불안이 있었기에 준비를 했고 불안이 있었기에 환경을 개선해 왔다. 그러나 불안은 영혼을 잠식시키는 요소이기도 했다. 과도한 불안은 인간을 이상심리를 형성하기도 한다.

많은 정신분석학과 임상분석의 진보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원시시대의 정신세계를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불안은 여전히 힘이 있고 인간을 가장 크게 지배하고 있는 정신작용이다.

인간은 진화하면서 동시에 진보를 이루었다. 진보는 과학의 발달과 정신작용으로 나타났다. 그리고 진화된 과학문명과 정신진보는 인간의 삶의 형태와 방식을 바꾸었다. 생존에서 머물 것 같았던 인간의 진보는 생존을 너머 행복을 추구했다는 것이다. 이유는 인간의 수명은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아무리 노력해도 인간의 수명을 늘릴 수 없다. 그렇다면 관심할 것은 수명이 아니라 삶의 행복이다. 프랑스혁명도 빵의 문제로 시작되었지만 근본은 자유고 방향은 연대였다. 인간은 약하기 때문에, 외롭기 때문에, 불안하기 때문에 함께하는 것이었고 그것이 가치였다. 모여 살면서 모여서 이야기를 했으며 모여서 음식을 나누었다. 그것이 불안을 이기는 방법이었고 행복이었기 때문이다.

젊은 미술작가들 몇 명이 모여서 ‘느슨한 연결구조’라는 이름을 지었다는데 나는 이것을 ‘가벼운 연대’라고 부르고 싶다. 지금의 젊은 세대를 일컬어 인류역사상 가장 똑똑한 세대라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나이 먹은 사람들은 범접할 수 없는 그것이 있다.

‘연대’하면 뭔가 무겁고 비장하고 희생이 먼저 생각나지만 이들은 그렇지 않다. 불안에 대해서는 절박하지만 경쾌하고 유쾌함이 있다. 무엇보다 먼저 자신의 행복을 선택하는 능력이 있다. 연대도 행복을 위한 것임을 분명히 한다. 엄청난 능력이다.

불안은 살아있는 누구에게나 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있으며 내일은 내일의 불안이 또 등장 할 것이다. 살아있다는, 살아가야 한다는, 생존해야 하는 삶에서 숙명처럼 동반하는 단어가 ‘불안’이다. 살아있는 동안 어차피 존재하고 만나는 것이라면 불안에 대해 피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 반응해야 한다. 피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불안’을 나누는 사람들과 연대해야 한다. 표현하고 연대하는 것이 불안을 이기는 유일한 방법이다. 그래야 행복해진다. 행복을 선택하고 키우는 능력도 훈련해야 하는 진화의 영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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